아름다운 산과 산행기

북한산 13성문 자료

shepherd2 2011. 5. 5. 22:32

▶북한산성과 성문의 자료

북한산성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로 원래는 백제시대에 쌓은 토축산성이었다. 고려 고종 19년 (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재궁 (梓宮)을 옮겨온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 (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조선 영조 21년 (1745) 스님 (僧) 성능 (聖能)이 지은 『북한지 (北漢誌) 』라는 문헌에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東將臺) · 남장대 · 북장대와 행궁· 군창 (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백여만평으로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 보수·복원하였다.

이 성벽에는 정문이 되는 서쪽의 대서문을 비롯해 대남문, 대동문 등 누각을 갖춘 큰 문과 보국, 용암 등 누각이 없는 암문(暗門)을 합해 14개 성문이 요소요소 여러 곳에 있었다.  성 안에는 또 하나의 성을 쌓고 만약을 대비했다.  성을 쌓는 작업은 놀랍게도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북한산은 그만큼 천연적 요새로서의 기막힌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북한산성은 안타깝게 한번도 써먹지 못하고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버리는 굴욕의 역사를 겪게 된다.  북한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차린 일본은 한일합병 뒤 북한산성에 일본 헌병대를 곧바로 주둔시켰고 산성안의 시설물 대부분을 불태웠다. 그렇게 북한산은 한민족 역사의 조락에 휩싸여 폐허의 내리막길로 접어 들었던 것이다.

자연재해와 뒤이은 분단시대의 비극은 산성계곡에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을 홍수로 휩쓸려 보냈고, 산사태에 묻혔고 폭격으로 모조리 초토화시켜 버렸다.  지금은 그 슬픈 역사의 쓸쓸한 잔해들만 풀섶에 나뒹군다.

북한산성 축조
지금의 북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서울 도성 배후에 있는 북한산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인정하고 산성의 수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 숙종 57년(1711년) 서울백성들과 삼군문(三軍門)의 군사들이 놀랍게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완공 한 것으로, 수축 당시 13개의 크고 작은 성문과 여장 2,807첩을 축조하였으며 성의 총연장은 7,620보(약 9,500m)에 높이는 3~5m에 가까운 방대한 규모이다. 또한 북한산성 축성후 수비 보완책으로 성내 계곡에 중성)을 축조하였고, 숙종 말년에는 북한산성과 도성 중간지역인 세검정 서편에 홍지문을 비롯한 탕춘대성을 축조함으로써 도성(都城)을 모성으로 하고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하는 이 일대 전략개념에 완벽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급시 왕과 백성이 함께 들어가고자 했던 북한산성은 이후 전란이나 우환이 없어 산성을 이용한 경우는 없다 한다.

북한산성 성문
북한산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어김없이 성문을 만나게 된다. 숙종 37년 축성 당시 수문(수문), 서암문(서암문), 북문, 백운봉 암문(백운봉암문), 용암 암문(용암 암문), 소동문(소동문), 동암문(동암문), 대동문(대동문), 소남문(소남문), 청수동 암문(청수동 암문), 부왕동 암문(부왕동 암문), 가사당 암문(가사당 암문), 대서문(대서문) 등 13개의 문을 완성하였으며, 숙종 40년에는 중성 축조때 중성문, 시구문, 수문 등 3개의 문을 추가로 만들어 모두 16개에 이르렀다.



▶서암문(西暗門)/시구문(屍久門)
서암문은 수문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내에서 생긴 송장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은 시구문(屍久門)으로 부르고 있다. 서암문은 대서문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지형이 낮고 험하지 않으므로 방어상 취약지임을 감안, 주변 성벽을 구축하고 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문과 연결된 성벽을 'ㄱ'자 모양으로 돌출 되도록 축조하여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북문(北門)
북문(北門)은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의 해발 430m 능선에 당초 홍예식에 문루를 갖춘 큰문으로 축조되었다. 문루는 오래 전에 소실된 채 육축상단을 마감한 장대석은 전부 무너져 내리고 홍예돌 윗부분이 완전 노출된 채 균열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상부의 초석도 절반은 없어지고 5개만 위험한 상태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1988년 큰비에 육축을 포함한 성벽이 15m가 무너져 성문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는 바 대책이 절실하다.



▶위문(衛門)
이문은 일제때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리고 있다. 백운봉 암문은 백운대와 만경대사이에 있는데 출입구는 네모난 형태이며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당초부터 없었으나 문짝을 달았던 흔적은 남아 있다. 출입문 주위는 대체로 양호하나 여장을 비롯한 상단의 성돌이 무너져 내려 높이가 상당히 낮아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암문은 백운대 정상을 앞두고 반드시 들러 땀을 식히는 곳인데, 약수로 갈증을 풀며 노적봉과 염초봉 사이의 일직선으로 뻗은 계곡을 감상하는 사람들만이 갖는 기쁨일 것이다.



▶용암문(龍岩門)
용암 봉암문, 용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여 도선사, 북한산장, 노적봉을 연결하며, 옛날에는 중흥사, 태고사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한편, 부근에는 과거 이 일대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龍岩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무너진 탑과 석축이 남아 있으며, 북한산장이 자리하여 많은 등산인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대동문(大東門)
대동문은 우이동의 소위 '진달래능선'이 시작되는 해발 540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서문과 같은 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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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에 문루를 갖추어 지금처럼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대동문은 산성을 지키는 삼군의 하나인 금위영 본부 자리다. 대동문이 지키고 선 고갯마루 일대를 옛날에는 석가령 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동문의 현판 글자는 북한산성을 쌓은 숙종왕의 어필을 집자한 것이라고한다. 



▶보국문(輔國門)
보국사가 아래에 있었기에 보국문이라 불렀던듯, 해발 567m의 높은 지점에 위치하여 정릉을 내려다보고 있다. 보국문은 동쪽에 있는 암문으로서 당초에는 동암문으로 칭하였다.



▶대성문(大成門)
대성문은 보현봉과 연결된 해발 625m의 지점에 위치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형제봉을 거쳐 보토현과 이어진다. 이 문은 우선 주변 여건을 검토해 볼 때 그 중요성은 크지 않은 듯하나 규모는 북한산 성내 성문 중에서 가장 크다. 보토현을 경유하여 경복궁과 행궁을 이어 주는 가장 가깝고 편리한 코스이므로 유사시 임금이 통행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큰문을 설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남문(大南門)
대남문은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 해발 663m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앞뒤로 넓은 터를 갖고 있어 마치 평창동 일대를 긴팔로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대남문은 백운대쪽에서 바라보면 성문이 보일 듯 말 듯 아득하게 보이며 보현봉에서 백운대를 뒷배경으로 내려다 보는 맛도 일품이다. 이문은 대동문과 구조가 흡사하다.



▶청수동암문
청수동, 부왕동, 가상당암문에는 표지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명칭이 불리지도 않아 문의 명칭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청수동암문은 문수봉과 나한봉 사이의 해발 694m지점에 위치하여 승가사 뒷산 능선에 있는 비봉과 연결되며 대남문과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인데 이문도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출입구를 갖추고 있으며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청수동암문에서 대서문에 이르는 코스는 크고 험한 봉우리가 계속 이어지는 장쾌한 여정이다. 이 일대에서 내려다보면 아득하게 삼천동의 산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나한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까마득하여 마치 신선이 되어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기분에 빠져든다. 길이 이어질 듯 끊어질 듯한 능선과 벼랑 사이를 한시간여 정신없이 더듬다 보면 좌측으로 꽤 큰 성문이 나타난다. 거리로 보면 청수동암문과 대서문의 중간쯤 되는데, 해발 521m지점에 위치하여 좌측 계곡으로 내려가면 삼천사와 진관사가 나오고,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부왕사터가 나온다.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은 원각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중취봉 기슭의 험준한 능선에 잘 감추어져 있어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암문중 제일 규모가 커서 폭은 16~54㎝, 높이는 53~81㎝ 차이를 보여 폭이 2.54m, 높이가 2.83m에 이르고 있다.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부왕동암문에서 중취봉과 용혈봉을 넘어 의상봉을 향하다 보면 해발 448m의 험한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성밖으로 내려가면 중골이 나오고, 성내 계곡으로 내려가면 국녕사를 경유하여 성내 주차장이 나온다. 이문은 국녕문(國寧門)이라고도 불리며 규모나 구조에서 청수동암문과 흡사하다.



▶중성문(中城門)
중성문은 서쪽의 비교적 낮은 지역에 위치한 대서문이 함락되었을 때, 제 2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의상봉과 원효봉 사이의 협곡에 축조한 성문이다. 전면의 성곽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해인 숙종 38년(1712년) 산성수비 봉한대책의 일환으로 축조한 중성이다.
당시 별도의 중성을 축조한 이유는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 유영, 창고 등 성내 시설물과 인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곽의 규모는 영취봉과 중봉 방향으로 약 200m에 달하며 성문으로 홍예 형태의 중성문과 그 외에 시구문 수문을 건립하였다. 중성문의 당층문루는 19세기 말, 수문은 1915년 8월의 홍수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서문(大西門)
북한산성의 중심이 되는 대서문은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서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상 적(당시 청, 왜)의 목표가 되기 쉬운 취약지이기도 하였다. 이문은 성내 북한리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하던 애환이 깃들인 문으로 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를 하여 달구지에 싣고 새벽같이 이 문을 통하여 서대문 영천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또한 이 일대는 살구나무가 많아 이른 봄철이면 화사한 살구꽃을 보기 위해 상춘객들로 붐비었으며 성곽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 아름다워 문인, 화가 등 예술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대서문은 홍예식에 문루를 갖추고 있다. 현재 문루는 복원된 반면 문짝과 문루 양편의 협문 그리고 담은 아직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의 일부가 폭풍우로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되고 있어 최근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육축은 무사석(무사석)으로 정교하게 수축하였으나 전쟁의 상처로 보이는 흔적이 있으며, 내부에는 차량 진동으로 인하여 벽석이 균열되는 등 파손이 심화되고 있다. 육축위에는 몸을 숨기고 총포를 쏠 수 있는 문루여장 전면에 10개 두었는데, 일반 성벽의 여장과는 달리 한 덩어리의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며, 총구가 아래로 향한 근총안을 1개씩 둔 것이 독특하다

                   

                                                   
To Live witout Your Love  - Monika Mar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