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아시나요

[스크랩] 5.16 당시 한 군인의 회고록

shepherd2 2009. 4. 21. 00:17

인간 박정희와의 첫 인연 <26회>
제3장 5.16군사혁명

내가 처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으로 막 군복을 입었을 때였다.

▲1943년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대표로 나가 경례를 하는 박정희 생도

당시 그는 우리 중대장이었다. 작은 체구이면서도 단단해 보이고 말이나 몸가짐이 단정한 상관이라고 느꼈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인상이나 사건은 기억에 없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0년 겨울이었다. 특수정보기관인 남산학교에 근무하던 중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 일정한 소속도 없이 대원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제2사단에서의 더부살이를 끝으로 겨우 육군본부의 정식명령을 받아 대구로 가서 CIC특무차장이 되었을 때였다.

 

 

 

 

 

 

▲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1947년)

내 직속상관인 CIC본부장은 한웅진 중령이었는데, 그는 박정희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 동기생이었다.

박정희는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연루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인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인간됨을 잘 아는 동료들의 적극적인 감형운동 덕택에 사면을 받아 석방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 군속으로 한동안 근무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전쟁이라는 돌발적 비상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전격적으로 군인 신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남산학교 대원들 모두 육군본부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가 대구에 갔을 때 박정희는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와 한웅진 중령은 육사 동기라는 끈끈한 인연에다 똑같이 애주가로서 의기가 투합해 자주 어울렸고, 술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까지 동아리가 됨으로써 세 사람은 거의 날마다 저녁이면 대구의 술집들을 누비고 다녔다.

나이는 박 중령이 1917년생으로서 당시 33살, 내가 1922년생이니까 5년 아래인 28살, 한 중령이 24살이었다. 그처럼 나이차가 있다 보니 박 중령은 한 중령에게 으레‘형님’이었고, 덩달아 나까지 한 중령으로부터 같은 대접을 받았다.

술자리 같은 사석에서야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까지 스스럼없이 나한테 같은 호칭을 쓰는 데는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왜 그러쇼. 남 앞에서 제발 나한텐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상관이 하급자 보고, 입장 난처하게 그게 뭐요?”

내가 그렇게 타박을 안기면, 성품이 담백하고 소탈한 한 중령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아, 내가 형님 보고 형님이라는데, 누가 뭐라든 말든 대숩니까?”

  ▲ 호걸의 풍모를 지녔던 한웅진 장군

한 중령은 주기가 오르면 평상시와 달리 짓궂은 장난기를 발동하는 애교스러운 버릇이 있었다. 술을 한참 마시다가 오줌이 마려운 척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가서 박 중령의 전투화 속에다 몰래 실례를 해놓고는 시치미 뚝 떼고 들어오는 것이다.

박 중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술자리가 파한 뒤 밖에 나가서 무심코 신발에 발을 쑥 집어넣다가 솟구치는 오줌에 바지를 흠뻑 적시곤 했다. 황당한 꼴을 당하는 일이 하도 빈번하다 보니 함께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 본인이 주의를 하는 기색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매번 신발에 오줌을 담아 놓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인터벌을 두어 그런 장난을 계속하는 데야 봉변을 모면할 도리가 없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버럭 화를 낼 법도 하련만,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 친구, 또 장난쳤군.”

그러면서 기가 차다는 듯 웃어넘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딱딱한 인간상하고는 전혀 다른,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친하게 어울리다가 얼마 후 한 중령이 전보되고, 후임 본부장으로 온 김창룡 중령과 트러블을 일으켜 내가 제3사단으로 전보발령을 받아 대구를 떠나는 바람에 박 중령하고도 헤어져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그때 이미 그와 나의 관계는 운명적인 매듭이 져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의미심장한 송별 격려금 <27회>
제3장 5.16군사혁명

1954년 10월, 제3사단 제23연대장을 끝으로 일선근무를 마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교육과장으로 후방근무를 시작한 나는 국방대학 창설준비위원회 간사, 예비사단추진위원회 위원, 육군사관학교 참모장, 제2훈련소 교관단장과 참모장 등을 두루 거치며,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육군의 전력 보강과 새로운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선진적 제도개선 및 체제정비 작업에 미력하나마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던 중에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1958년 3월 준장에 진급했다. 대령 계급장을 단 지 5년만이었다.

▲1960년 육군 정보학교 교장 시절. 시찰 나온 정일권 장군의 영접

준장에 진급한 지 5개월만인 1958년 8월, 나는 경북 영천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갔다. 그리하여 2년간의 정보학교 근무를 마치고 1960년 7월 작전참모부 교육처장으로 다시 육군본부에 불려 올라왔는데, 얼마 후 박정희 소장이 내 바로 직속상관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박 장군은 사상 관련 혐의로 한때 뼈아픈 좌절과 추락을 경험해야 하는 불우한 시절이 있었다. 그랬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에 복귀하고 나서 비교적 순탄한 코스를 밟아 1955년에 별을 달았으며, 육군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6관구사령관, 부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을 거쳐 1960년 9월 작전참모부장에 부임했던 것이다. 그러니 근무지가 달라서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던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긴밀하게 복원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거나 다시의 나라꼴은 이미 1950년대 후반기부터 말이 아니었다.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국가산업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서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할 정치권이 정부나 여․야당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도덕의 해이(解弛)로 부패행위와 당리당략에만 눈이 어두워 제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이었고, 그 해악적 영향이 사회 전반에 미쳐서 나라의 앞날이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치러낸 전쟁만 국난이었던 것이 아니라, 전후의 상황 역시 국난의 연장선이었다.

연대가 바뀌어도 희망의 징후가 보이기커녕, 오히려 크나큰 시련과 암담한 현실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1960년 제3대 대통령선거의 부정행위가 촉발시킨 4.19민주혁명과 그 이후의 국내사정은 사회혼란의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유당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학생들과 민중의 봉기 덕분에 정권을 거저 얻은 민주당은 한 지붕 아래서 구파와 신파로 갈라져 밥그릇싸움에 여념이 없었고, 가장 강한 사회집단세력으로 떠오른 학생들은 독재정권 타도 성공에 기고만장한 나머지 조금도 현실성 없는 남북통일을 외치며 북한 젊은이들과 대화하겠다고 판문점으로 달려가는 판이었다.  

이 위기국면을 슬기롭게 수습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도덕적 힘이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 도덕적 힘을 갖추고 있는 집단은 오로지 군부뿐이지 않은가.

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이런 결론 쪽에 기울게 되었고, 그와 같은 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 머릿속에서 점점 굳어만 갔다. 나는 박 장군과 호젓이 만나는 시간이면 넌지시 이런 소리를 곧잘 했다.

그것은 공감을 얻기 위한 토로인 동시에 은근한 의사타진과 촉구의 뜻도 담겨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럴라치면 박 장군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기껏해야 짧은 한마디로 긍정을 표시할 뿐 속이 시원하게 딱부러진 의사표명은 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질문과 상관없이 그 무렵 그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 이후의 역사가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박 장군은 작전참모부장에 취임해 불과 3개월도 못 채우고는 그해 연말에 제2군 부사령관으로 갔다. 1960년 한 해 동안에만 군수기지사령관․1관구사령관․작전참모부장․2군부사령관으로, 겨우 2개월 걸러 새로운 자리로 바쁘게 옮겨 다닌 셈이다. 그 단순사실을 두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시쳇말로‘뺑뺑이 돌리는’ 군수뇌부에 대한 앙심이 쿠데타를 촉발한 원인의 하나라고 인간 박정희의 위대성과 5,16군사혁명의 역사적 당위성을 깎아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폄훼요 편견이다.      

박 장군이 떠난 뒤, 나도 며칠 남지 않은 세모를 넘기고 1961년 새해가 밝는 대로 군사관련 시찰이 목적인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준비에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정신없이 쫓기고 있을 때, 갑자기 박 장군이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했다.

 

  ▲ 1961년 1월 미국 시찰 (왼쪽에서 3번째가 필자)

박 장군의 신당동 집으로 찾아간 나는 그가 용건을 꺼내기에 앞서 미국여행 이야기를 했다. 나로서는 아랫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인사성 보고라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이 하려고 하던 말을 막은 꼴이 되고 말았다.

“얼마 동안이나 가 있게 되오?”

“1월 2일 떠나서 2월 5일 돌아오니까, 꼭 한 달입니다.”

“잘 됐군. 장 장군은 앞으로 국가와 군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까 많은 공부 하고 오시오.”

그렇게 격려하는 박 장군의 표정은 어쩐지 밝지 않았다.

“각하, 그런데,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냐. 별다른 거 없고, 그냥 문득 얼굴 보고 싶어 그랬던 거요.”

박 장군은 끝까지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상대방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야 나로서도 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 장군은 책상서랍에서 20만 환을 꺼내어 내밀었다. 여행경비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내가 몇 번이고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더 이상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 하는 수 없이 받아 넣고 나왔다.

박 장군이 그날 갑자기 보자고 한 진짜 이유를, 그리고 송별격려금 20만 환에 담긴 의미를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5개월 후, 나 자신이 군사혁명에 전격적으로 뛰어들어 선두에 서면서였다.

 

 

혁명전날 박정희 장군의 호출 <28회>
제3장 5.16군사혁명

1961년 5월 15일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본부에 있는 나한테 박정희 장군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좀 만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5시 퇴근 후에 바로 뵙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우리 집으로 오시오.”

“알았습니다.”

통화는 서너 마디 대화만으로 끝났지만, 묘한 긴장감이 나를 에워쌌다.

그 무렵, 박정희 장군을 구심점으로 한 군부 일각의 심상찮은 움직임이 희미하게나마 군사정보기관에 포착되어 경계경보가 작동하고 있는 긴박한 시점이었다.

오후 5시, 근무를 마치자마자 작전참모부 사무실을 나와 지프를 타고 신당동 자택에 달려갔더니, 박 장군이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거실에서 단둘이 마주앉았다.

“장 장군, 오늘 밤이 거사요.”

박 장군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예견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단계까지 나한테 일언반구 언질이 없었던 데 대해서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휘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일선지휘관 신분이 아닌 나에 대한 호의적 배려였으리라. 나답게 단순히 정리하고 넘어갔다.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박 장군은 비로소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각하,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뭘 해야 합니까?”

“당신, 장도영 장군하고 대학동창이랬지?”

“예.”

“그러니까 당신 종씨 좀 설득해 주시오.”

“그러고서는요?”
“낙하산부대를 동원해 주시오.”

“그뿐입니까?”

“그 두 가지만 해주면 되겠어.”

채 5분도 안 되어 대화는 끝났다.

내가 일어나 나오려고 하자, 박 장군은 밤 10시에 종로 화신백화점 뒤 미화호텔에 가면 한웅진 장군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같이 제6관구사령부로 오라고 했다. 6관구라면 박 장군의 전 근무지였다.

 

▲1960년 초 육군정보학교 시절. 필자 옆 왼쪽이 정일권 장군, 왼쪽에서 2번째가 김웅수 장군

나는 그 길로 보문동 집으로 들어갔으나,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기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평소처럼 그냥 퇴근해서 귀가한 줄만 알고 있는 아내를 바로 쳐다보기조차 괴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아내를 보고, 정릉어머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정릉어머님이란 장모였다. 친어머니는 고향 김제에 계시니까, 장모라도 마지막으로 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내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아내와 아이들은 좋아서 야단이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들고 처갓집에 찾아가자, 장모님은 군무에 바빠 쉴 틈이 없다는 사위의 느닷없는 예방에 여간 기뻐 반기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못 찾아뵈어 죄송하다고 인사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맞추어주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고역을 치르다가 9시가 조금 못 되어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한테 CPX(작전지휘연습) 때문에 나가봐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전투복을 입으면 이상하다는 느낌을 줄까봐 카키복을 걸치고, 신발만 단화 대신 전투화를 신었다.

“다녀오겠소.”

아내한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승이서 마지막 작별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속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프를 달려 미화호텔에 도착한 것이 10시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마땅히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한웅진 장군이 보이지 않았다. 10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각이 여삼추란 말 꼭 그대로 속으로 안달복달하고 있는데, 약 5분쯤 지나서야 한 장군이 꺼떡꺼떡 들어왔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라고 당신 시간을 안 지키는 거야.”

“형님, 그게 아니라, 박 장군이 집으로 오래.”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지금 바깥 다른 전화로 확인했다니까.”

한 장군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호텔 같은 공공장소의 전화는 도청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전화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나 또한 밖으로 나가서 공중전화로 박정희 장군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정말 자기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 길로 한 장군을 내 지프에 태워 함께 신당동으로 달려갔다.

 

긴박한 혁명전야 <29회>
제3장 5.16군사혁명

박 장군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루의 소파에 앉아 있던 박 장군이 우리더러 신발 벗지 말고 그냥 올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주춤주춤 들어가 앞자리에 막 앉자, 박 장군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사가 폭로되었다는 것이었다. 끝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피가 정수리로 확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각하, 그렇다고 이냥 주저앉을 일이 아니잖습니까? 갑시다. 기왕지사, 한 번 해보고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소리치며 설치자, 박 장군도 생각이 달라지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막 나왔을 때였다. 한웅진 장군이 갑자기 당황해서 외쳤다.

“어, 내 권총!”

무슨 소린가 했더니, 미화호텔 객실에서 권총 풀어놓고 나를 기다리는 동안 박정희 장군의 호출전화를 받고는 비밀통화를 하기 위해 밖에 나갔다 들어오다가 나를 만나 그대로 신당동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권총 챙길 생각을 깜빡했다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박 장군이 자기 지프 앞자리에 앉고, 나와 한웅진 장군이 뒷자리에 탔다. 출발하기 직전, 내가 불쑥 물었다.

“각하, 뒤의 제 차는 어떻게 하지요?”

내 지프에는 운전병 조군과 함께 부관 권천식 소령과 한 장군의 부관 신동관 소령이 타고 있었다.

“글쎄, 어떡하지?”

“그럼 각하께선 한 장군과 같이 빨리 먼저 출발하십시오. 어떨지 모르니까 제가 뒤를 따르겠습니다.”

  ▲ 5.16 전인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교육처장 시절의 필자

어떨지 모른다는 것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 장군의 지프가 출발해서 저만치 나아가자, 어디선가 난데없는 지프 한 대가 골목에서 튀어나와 따라붙는 것이 아닌가.

소령 두 명을 뒷자리에 태우고 앞자리에 뛰어오른 나는 마음이 다급해진 나머지 운전병더러 미행차량을 추월해 가로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되자, 지프 한 대는 앞서가고 두 대는 뒤에서 엎치락뒤치락 서로 진로를 방해하며 따라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미화호텔에 도착해 한웅진 장군의 권총을 챙기자,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미행차량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쓰지 말고 6관구사령부로 쏜살같이 달려가라고 재촉했다.

박 장군의 차가 출발하자마자 미행차량이 또 따라붙으려고 했다. 그것을 내 차가 잽싸게 앞질러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상대방이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할 때마다 머리를 들이밀어 방해를 놓았다. 그러다 보니 안국동에서 좌회전해 중앙청 앞으로 가서 다시 좌회전해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서울시청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는 박 장군의 차와 상당한 간격을 벌려놓는 데 성공했다.

박 장군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다소 안심이 된 나는 운전병을 보고, 시청 앞에서 한국은행 쪽으로 방향을 틀라고 지시했다. 미행차량에게 혼란을 주어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행자는 내 차를 거들떠도 안 보고 곧장 남대문 쪽으로 내빼는 것이 아닌가. 박 장군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꿰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 지시에 따라, 운전병은 우로 급회전하여 미행차량을 뒤쫓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차 성능이 우수하여 금방 따라잡았고, 다시금 진로를 가로막으려거니 앞서려거니 하는 곡예가 한동안 벌어졌다.

한강대교에 이르기까지 그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병더러 초스피드로 달려 다리를 건너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 사육신 묘 있는 근방에서 차를 세우고 권총에 실탄을 재어 미행차량을 기다렸다. 부득불 처치해버릴 각오였다.

그런 내 기세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5분 가까이 기다려도 문제의 미행차량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강을 건너지 않고 되돌아갔는지, 건너와서 동작동쪽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한시름을 던 나는 다시 운전병을 재촉해 출발했는데, 영등포와 김포공항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도달하자, 박정희 장군이 차를 멈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늦은 사유를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두 대의 지프는 어둠을 뚫고 쏜살같이 6관구사령부를 향해 달렸다.

박정희 장군의 차와 내 차가 제6관구사령부에 도달하자, 의외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문 앞에 부채살 모양으로 포진해 있던 병력이 앞서서 달려오는 박 장군의 차를 삽시간에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제6관구사령부와 공수특전단에서 <30회>
제3장 5.16군사혁명

조금 간격을 두고 뒤따르던 내 차는 엉겁결에 그 현장을 통과해 저만치 벗어나서 멈추고 헤드라이트를 껐다. 이런 낭패가 있나 싶었다. 당장의 박 장군 안위가 몹시 걱정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역사의 물꼬를 바로잡으려는 혁명봉기가 채 기를 펴보기도 전에 이처럼 간단히 무산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으니 가슴속에 불이 나고 침이 바작바작 말랐다.

  ▲ 5.16 때의 박정희 장군

나는 뒷자리의 권천식 소령과 신동관 소령을 돌아보고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묵묵부답이었다. 나 또한 그들에게서 신통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운전병더러 그냥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까짓 거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낙하산부대를 동원해 한바탕 해보고 나서 책임을 지든지 말든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그러나저러나, 이 노릇을 어쩐담. 막상 낙하산부대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디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사전에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관여할 것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문득 권천식 소령이 4대독자라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야 스스로 원해서 하는 바이니 죽게 되면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남의 집안 대를 끊어 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권총 챙겨 휴대하고 오라고만 했을 뿐, 그때까지 나는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준 바가 없었다.

나는 운전병더러 공수특전단 정문을 그냥 지나쳐 곧장 달려가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부대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밤늦은 시간인데도 불이 환히 켜져 있고 뭔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200여 미터 통과한 다음 차를 멈추게 하고, 권 소령더러 내리라고 했다. 느닷없는 지시에 권 소령은 당황했다.

“아, 내리라니까.”

“각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뭣 때문에 왔는지 너 알기나 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속부관으로서…….”

“야, 잔말 말고 빨리 내려. 시간 없어.”

“그럴 수 없습니다. 각하를 끝까지 모셔야 합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다가, 나중에는 내가 사정을 했다.

“권 소령, 그 충정은 고맙지만, 제발 내 말 들어. 내가 어떻게 되는 경우, 자네가 우리 가족을 돌봐줘야 할 거 아냐?”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을 때야 권 소령은 하는 수 없이 고집을 꺾고 시부저기 차에서 내렸다.

깜깜한 어둠 속에다 그렇게 권 소령을 떨어뜨려 놓고 차를 돌려 공수특전단으로 되돌아가 안에 들어가려고 하자, 점문 경비병들이 딱 막아섰다.

“이놈의 새끼들! 장교만 해도 영내에 마음대로 출입하는데, 이거 별 안 보여?”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았으나, 경비병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외부인은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부대장이 엄명을 놓았다는 것이었다. 공수특전단장은 박치옥 대령이었다.

나는 호통을 쳐서 부대장실에 전화를 넣도록 명령했고, 그래서 박 대령과 통화를 한 후에야 비로소 정문을 통과해 영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대장실에 들어가니, 박치옥 대령과 함께 뜻밖에도 특전부대장 장호진 준장이 앉아있었다. 장 장군은 내 학도병 친구에다 육군대학 동기생이기도 해서 잘 아는 처지였는데, 낙하산부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을 군고위층으로부터 부여받고 나보다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장 장군은 나를 보자 어쩐 일이냐며 어색한 인사를 했다. 나는 다짜고짜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여보, 장 장군.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알겠어?”

이런 퉁명스런 허두로 기선을 누른 다음, 애국심 자극하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며 협조를 구했다. 마침내 장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이 뇌었다.

“잘 되어야 할 텐데.”

설득에 성공한 나는 힘차게 악수를 했다. 그런 다음 부대장실에 다시 들어가자, 마침 박치옥 대령이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금 장경순 장군님이 와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피가 정수리로 확 솟구쳤다. 단속 차원에서 상황체크를 하는 장도영 참모총장한테 박 대령이 곧이곧대로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내가 불같이 화를 내며 호통하자, 박 대령은 얼른 수화기를 나한테 넘겨주었다. 저쪽에서 바꿔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어김없이 장도영 장군의 음성이 전선을 타고 들려왔다.

“아니, 장 장군이 거긴 웬일이오?”

“각하,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렇잖아도 제가 찾아뵈려고 하던 참입니다.”

“당신 지금 엉뚱한 생각 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도 늦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해.”

“하여간 거기 어딥니까?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꼭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장 장군은 말이 통하지 않겠다 싶은지 전화를 딸깍 끊어버렸다.

내가 하도 딱장대같이 소리 버럭버럭 지르며 설치니까, 박치옥 대령은 나와 참모총장의 통화 도중에 슬그머니 도망치고 없었다. 장호진 장군만 주인 대신 남의 방 지키는 객이 되어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다.

장도영총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31회>
제3장 5.16군사혁명

나는 비로소 냉정을 되찾아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돌아보았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가닥을 풀어 나가야 하나. 그렇지만 답이 없었다. 미치도록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참모총장이구나 싶어, 얼른 장호진 장군 보고 내가 없다고 대답하도록 부탁했다. 내 짐작이 딱 들어맞았다.

“아, 예. 각하 전화를 받자마자 가버렸습니다.”

장 장군이 내 부탁대로 얼렁뚱땅 때워 넘기고 있을 때, 문득 중령 계급장을 단 헌병장교 한 명이 부대장실에 고개를 쑥 들이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해서 도로 빼는 것이었다.

나는 가까이 있던 장교 하나를 보고, 얼른 뛰어나가 그 헌병중령을 꼭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헌병중령이 쭈뼛쭈뼛 들어와 경례를 했다.

“귀관 여기 뭣하러 왔어?”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뭐야? 이 새끼!”

내가 버럭 소리지르자, 헌병은 엉겁결에 허리에 찬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내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 한주먹에 때려눕혔다. 그러고는 찍어 누르며 다그쳤다.

“어디서 권총을 빼. 너 이 새끼, 나 장경순이 체포하러 왔지? 누구 명령을 받고 왔어?”

그러자, 헌병은 오히려 얼굴에 화색이 돌며, 사실은 공수특전단을 동원하러 왔다고 실토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혁명동지로서, 이중삼중으로 조직망을 가동한 데 따라 나름대로 사명을 띠고 공수특전단에 왔다가 나를 발견하자, 훼방꾼이 와 있구나 지레짐작하고는 제풀에 바짝 얼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악수를 했다. 혁명 직후 경북경찰청장으로 간 강상희 중령으로서, 세월도 흐르고 신분도 달라진 훨씬 이후에 그와 나는 어쩌다 간혹 만나면 그때 일을 상기하고는 우리 둘만 의미가 통하는 껄껄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아무튼 한참 그 복대기를 치고 나서 박치옥 대령을 찾으니, 그는 나를 피해 제1대대에 가서 대대장과 같이 있었다. 내가 전화로 소재확인을 하고는 거기서 뭐하느냐니까, 부대동원을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그래서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출동하라고 심하게 다그쳤다.

낙하산부대 동원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하고 나자, 박정희 장군의 안위가 크게 걱정되었다. 그래서 차를 타고 출발해 6관구사령부로 향했다.

그런데, 쏜살같이 달리다가 문득 생각하니, 장호진 장군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미처 못하고 먼저 떠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혁명에 공감하는 듯이 말하긴 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지 확실한 대답을 받기라도 하고 헤어졌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못하고 헤어진 것이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잠시 후에 장 장군 지프가 달려왔다. 그래서 붙들어 새삼스런 사례를 하고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장 장군, 어쩔 거야? 지금 우리와 손잡고 국가개혁에 적극 동참하겠소, 아니면 뒷짐지고 구경만 할 거요?”

“미안하오. 난 그냥 들어가서 잘래.”

장 장군이 매우 난처한 듯이 선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착잡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혁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니, 실패로 끝날 확률이 더 컸고 보니 어찌 선뜻 가담할 수 있었겠는가.

“알겠소. 그럼 가서 주무시오.”

나는 선선히 장 장군을 보내준 다음, 다시 차를 몰았다.

6관구사령부에 도착해 막 들어가려다가 육군헌병감 조흥만 준장과 마주쳤다.

그는 군고위층의 명령을 받고 박정희 장군을 체포하러 6관구사령부에 왔다가 막상 박 장군을 만나자 그의 기에 눌려 감히 체포할 엄두를 못 내고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어 나오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

잘 되었구나 싶었다.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조 장군, 우리끼리 한 번 피를 흘려보겠어, 아니면 협조를 하겠어?”

내 기세에 질렸는지, 그는 협조하겠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 5.16거사 3일후 국립묘지 참배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장도영 총장. 장도영 장군은 5.16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를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때, 한강대교 쪽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혁명군 일부와 이들의 시내 진입을 저지하려는 헌병대 사이의 총격전이었다. 조 준장은 즉시 출동 헌병대 지휘관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을 철수시켰다.

나는 조 장군에게 악수하며 고맙다고 사례하고는 그와 헤어져 사령관실에 들어갔다.

6관구사령관 서종철 소장과 참모장 김재춘 대령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비상사태를 당하여 갈피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그러니 방 안의 팽팽한 긴장감은 거의 폭발직전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나타나자, 내 기세가 하도 험악해 보였는지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았다.

나는 서종철 장군한테 경례를 했다.

“각하, 수고하십니다. 박정희 장군은 어디 계십니까?”

“여기 없소. 조금 전에 떠났소.”

그러자, 김재춘 대령이 박 장군은 해병대 병력을 동원하러 갔다고 알려주었다. 김포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제5여단이 혁명군에 동참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 장군이 아직은 무사하다는 사실에 적이 마음이 놓였고, 해병대까지 출동한다면 한판 제대로 붙기는 붙는구나 싶어 한결 희망이 솟구쳐 올랐다.

김 대령은 혁명주체의 한 명이지만, 당시 그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죽을 지경이다가 내가 나타나자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다고 나중에 토로했다.  

나는 서종철 장군한테 요구했다.

“각하, 죄송하지만, 참모총장 각하께 전화해서 저 좀 대주시지요. 제가 직접 걸면 받지 않으실 겁니다.”

서 장군은 다이얼을 돌려 장도영 장군을 부르더니 수화기를 나한테 넘겼다.

“각하, 장경순입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아니, 장 장군. 아직도 거기 있는 거요?”

“곧바로 각하 뵈러 가겠습니다.”

“여보, 이거 왜 이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돌아가라고, 제발!”

“제가 돌아가고 말고는 다음이고, 먼저 각하를 뵈어야 합니다.”

장도영 장군은 또 전화를 딸깍 끊었다.

어쨌든 박정희 장군의 안전을 확인했으니, 내가 거기 더 머물러 미적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서 장군에게 경례하고 곧바로 나왔다. 박 장군으로부터 부여받은 또 하나의 임무, 장도영 참모총장을 만나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5월 16일 새벽 <32회>
제3장 5.16군사혁명

제6관구사령부를 출발해 육군본부로 향하던 도중 노량진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방에 여러 대의 군용차량이 마치 야간훈련에서 이동하는 것처럼 헤드라이트를 가린 채 나와 같은 방향으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해병대 트럭이었고, 적재함에는 완전무장 차림의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열이 뻗쳤다. 이런 넋빠진 놈들이 있나 싶었다. 차량들을 차례로 추월해 맨 앞으로 가서 지프에 타고 있는 지휘관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 귀관!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혁명하러 가면서 이렇게 꾸물대 가지고야 일이 되겠어? 헤드라이트 켜고 빨리 좀 전진 못해?”

그제야 해병장교는 정신이 번쩍 든 듯, 각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켜도록 해서 속력을 내어 한강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호통을 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달려가는 그들을 보자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뒤를 따라 한강대교를 거의 다 건너갔을 때, 전방에서 천천히 달려오는 육군 지프 한 대와 마주쳤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범퍼에 별 두 개가 선명하게 빛났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니, 신웅균 소장의 차였다.

“각하, 지금 어디 가십니까?”

내가 단도직입으로 묻자, 신 장군은 대답 대신 그냥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각하, 협조하십시오. 보다시피 혁명군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곧 상황이 끝납니다. 협조하십시오.”

그래도 신 장군은 웃기만 할 뿐 좋다 싫다 분명한 태도표명이 없었다.

나는 더 말을 붙이고 싶은 기분도 아니거니와 그럴 만큼 한가하지도 않아 작별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는 금방 헤어졌다. 그런 다음 육군본부로 달려가다가 문득 한웅진 장군을 떠올렸다.

한 장군은 방송국을 장악해 군사혁명 소식을 세상에 공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혁명성공을 기정사실화해버린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장군이 제대로 해낼지 어떨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 서울역에 진군한 혁명군

그래, 육본에 가서 참모총장 설득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은 당장 방송국을 장악하는 게 중요해. 그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야. 이렇게 생각한 나는 운전병더러 KBS로 가자고 했다. 당시 KBS는 지금의 세종호텔 쪽 남산 밑에 있었다.       

이윽고 서울역 근처에 도달하자, 전방에서 콩을 볶는 듯한 총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상황이 벌어졌구나 싶어 긴장해서 현장에 도착해 보니, 앞서 간 혁명군 해병대가 멈춰선 채 전방을 향해 마구 실탄을 난사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저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목표도 방향도 없이 캄캄한 어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도 기가 막혀 해병대 지휘관을 닦아세웠다.

“이봐, 귀관. 지금 어디다 대고 쏘는 거야? 사격 당장 중지시켜. 적도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얼빠진 짓거리야. 당장 전진해!”

내가 호통을 치자, 그제야 해병부대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중앙청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장교는 오정근 중령이었고, 내 배재중학교 후배였다. 제3공화국 때 국세청장을 한 사람이 바로 그다.    

해병대를 보내고 퇴계로 쪽으로 차를 몰아 이윽고 KBS 앞에 도착하자, 한웅진 장군이 안에서 나오다가 나를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눈짓을 했다. 맡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득의의 제스처였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장도영 장군과 부딪칠 일만 남았으나, 사실은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장 장군 앞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제지를 받아 체포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닌 육군본부가 아닌가. 단신으로 적군 사령부에 뛰어드는 것에 못지않은 담력과 각오가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도 문재준 중령이 휘하병력을 이끌고 저지선을 돌파해 육군본부를 실질적으로 막 장악한 직후였다.

곧바로 참모총장실에 가서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도 3군 참모총장에다 해병대사령관까지,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들이 다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장도영 장군이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외쳤다.

“장 장군, 10분만! 아니, 5분!”

잠시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나중에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속으로‘웃기고 있네, 지금이 어느 때라고’하고 비웃으며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갔다.

“각하, 저더러 나가라는 말씀입니까? 제가 아니라, 나갈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자리의 기라성 같은 장성들 중에서 송석하 소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송 장군. 당신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혁명에 훼방 놓았다며? 지금 나라의 운명이 걸린 위급상황인데, 무슨 그따위 생각을 해. 나가! 당장 나가!”

  ▲ 5.16 직후의 필자

그는 소장이고 나는 준장이었지만, 상관에 대한 예우고 뭐고 없이 몰아붙였다.

나 바람에 실내 분위기는 삽시간에 살얼음판처럼 되고 말았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굳은 표정이었고, 당사자로 지목된 송석하 장군은 얼굴이 하얘졌다.

가만히 생각하니, 장도영 참모총장 한 사람한테 단도직입으로 부딪쳐서는 안 될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김신 공군참모총장의 손을 잡아끌며, 잠깐 둘이 보자고 했다. 김 장군이 슬그머니 일어나서 따라 나왔다.

나는 김 장군을 옆방으로 데려가 설득했다.

“각하, 각하야말로 다름 아닌 바로 김구 선생님 자제분 아니십니까. 추앙받는 애국자요 민족지도자로서 평생을 애쓰시다 비명에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해서라도, 누구보다 먼저 각하께서 이 혁명에 솔선 동참하고 지휘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픈 데를 꼬집으며 그렇게 설득하자, 김 장군은 협조하겠다고 선선히 응했다.

나는 참모총장실에 돌아와, 이번에는 해병대사령관 김성은 장군을 끌어냈다. 그래서 같은 방법으로 설득해 어렵지 않게 혁명 동참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을 데려나가 역시 혁명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타군 총수들이 나를 따라 차례로 옆방에 들어가서 하나같이 설득되어 나오니, 장도영 장군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으리라.

아무튼 나는 그제야 장 장군더러 혁명에 협조하도록 오금을 박았고,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그는 결국 우리가 들이미는 의자에 못 이긴 척 앉아 혁명의 얼굴마담 노릇을 한동안 하게 되었던 것이다.

 

5월 16일 아침 <33회>
제3장 5.16군사혁명

참모총장실을 한바탕 휘저어놓고 박정희 장군을 찾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온 나는 층계참에서 우연히 김형욱 중령과 마주쳤다. 그는 나와 같은 작전참모부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이 작자가 피로와 긴장으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눈에 핏발선 모습으로 씩씩거리며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평소 같았으면 대강 하고 넘어가주었을지 모르지만, 온 밤 내내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서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자연히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어 있는 나였다. 당장 불러 세웠다.

  ▲ 김형욱 대령

“귀관, 왜 경례 안 하나?”

“죄송합니다. 미처 못 봤습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너 눈이 삐었어? 멀쩡한 사람을 보고도 못 봤다니.”

“각하, 왜 이러십니까?”

“닥쳐, 이 새끼야!”

손바닥을 벌려 한 대 후려갈겼다.

김 중령은 데굴데굴 굴러 저만치 나가떨어져 처박히더니, 다음 순간 벌떡 일어서며 권총을 쑥 뽑는 것이 아닌가. 그도 성질이 보통 아닌 위인으로 평이 나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권총을 뽑는 것을 보고 더욱 화가 난 나는 번개같이 달려들어 손으로 쳐서 권총을 떨어뜨리고는 사정없이 두들겨 패주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혁명동지를, 그것도 두 사람한테나 손찌검을 하고 만 것이다. 심정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박정희 장군을 찾아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수고 많다고 하는 그의 치하가 끝나기도 전에, 내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러저러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고 실토하고는 백배사죄했다.

박 장군은 차마 나를 꾸짖지 못하겠는지, 묵묵부답인 채 씁쓰레한 표정만 지었다. 그 침묵 그 표정이 이후로 내 평생 동안 잊어지지 않는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무튼 전군에 초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혁명의 성공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단계가 되자, 그것을 기정사실로 굳히기 위한 여러 가지 후속조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의 시급한 한 가지가 홍보였다.

KBS를 장악해‘혁명의 소리’를 라디오로 계속 내보내고는 있었지만, 방송만이 매스컴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신문과 잡지 같은 시각매체(視覺媒體)의 중요성도 방송에 못지않고, 따라서 이들 매스컴을 이용해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홍보작업을 전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업무를 수행해야 할 부서가 육군본부 보도국이고, 보도국장은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 동기생인 김병률 대령이었다. 그를 불러놓고 말했다.

“이 비상시기에 보도국장의 임무가 막중해요. 혁명의 기반조성과 정착에 홍보가 매우 중요하므로, 당신이 좀 적극적으로 움직여줘야겠어.”

그러나, 김 대령은 입 꾹 다물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하, 안 되겠구나. 이 사람이 혁명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 판단되자, 보도국장 그만두라고 그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그런 다음 정훈장교 경력이 있는 원충연 대령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배재중학교 동기동창으로서, 내가 연대장 할 때 내 연대의 대대장과 부연대장을 역임했다. 영어에 능통하고 글도 잘 쓰는 똑똑한 인물이었다.

“원 대령, 자네 지금부터 보도국장이야.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보도국에 가서 데스크 차고 앉아 업무 장악하고 적극적으로 해. 알았어?”

원 대령을 보내고 났을 때, 박정희 장군이 급히 불렀다.                    

내가 찾아가자, 박 장군은 각종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느라 정신이 없는 중에도 조용히 단둘이 만나 말했다.

“장 장군, 이제는 대세가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고 자신해도 될 것 같소. 문제는 매그루더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것이지만…….”

“그가 아무리 유엔군사령관이라 할지라도 삼군(三軍)이 혁명에 동조하는 마당에 어쩌겠습니까. 남의 국내문제에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할 경우의 여러 가지 위험부담을 모르는 바보가 아닌 이상 운신에 한계가 있겠지요.”

“물론이지. 그건 그렇고……걱정되는 것은 과도기의 사회혼란인데, 전국 경찰을 휘어잡아 치안공백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적임자가 암만 생각해도 장 장군 당신밖에 없어. 그러니까 치안국장을 맡아주시오.”

“알았습니다, 각하.”

나는 선선히 대답하고, 치안국을 접수하기 위해 즉시 육군본부를 출발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생각이 달라졌다. 그 시점의 상황에서 치안국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박 장군은 혁명의 성공을 언급했지만, 아직은 유동적인 불안요소가 많을 뿐 아니라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도 박 장군을 옆에서 보좌할 유능한 참모가 내가 보기에는 없었다. 모두 흥분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바쁘게 서두르기만 할 뿐, 차분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서 정확한 조언을 해주고 지시사항을 제때 손발처럼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인물이 아쉬웠다. 하다못해 나라도 옆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얼른 헌병감 조홍만 장군한테 전화해서 치안국으로 빨리 오도록 했다.

내가 치안국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조 장군이 달려왔다.

“조 장군, 각하께서 나보고 치안국장 하라고 하시는데, 가만 생각하니 지금 각하 옆에서 제대로 보좌할 사람이 없소. 지금 이 시점이 얼마나 중요한 때요? 그러니 내가 가서 도와드려야 해. 나 대신 당신이 치안국장 하시오.”

“아니, 장 장군한테 맡긴 건데, 어찌 내가 멋대로 …….”

“어허, 참! 내가 돌아가서 보고하면 될 거 아니냐고. 어쨌든 지금부터 당신이 치안국장이야. 걱정 말고 잘 하시오. 알았소?”

 

  ▲ 지금의 서울시 의회 건물인 태평로의 舊국회의사당을 점령한 혁명군

나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조 장군한테 치안국장직을 떠넘기고 도로 육군본부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박정희 장군 앞에 가서 말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각하가 걱정되어 돌아왔습니다. 지금 각하 주변에서 누가 제대로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치안국장이 문젭니까? 그래서 조홍만 장군을 불러다 자리에 대신 앉혀놓고 왔습니다.”

그러자, 박 장군은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엔군총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이 무슨 딴죽을 걸지 몰라 그쪽에만 신경이 곤두서서 머리가 복잡하다 보니, 나의 독단적 처사를 나무라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기를 위한답시고 한 일이 아닌가.

내가 그토록 하도 설치고 돌아가다 보니, 당시의 신문에‘혁명의 참모장’이라고 표현되어 있다고 나중에 누군가가 기사를 보여준 일이 있다.

5.16군사혁명은 그렇게 성공했고, 그때부터 대한민국 역사는 오랜 굴절과 혼돈을 접고 희망과 번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출처 : 동 아 쉼 터
글쓴이 : 동 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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