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 의해 제기된 이후,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 이른바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 틈만 나면 주창한 한국병탄 계획이 러ㆍ일 전쟁을 계기로 본격화 된다.
일본은 러ㆍ일전쟁 도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 영토를 병참기지로 이용할 근거를 마련해 두고 같은 해 9월과 11월 군함 니타카(新高)호와 쓰시마(對馬)호를 각각 파견하여 독도에 망루 건설 가능성 조사를 마쳤다. 그러나 겨울철의 험악한 날씨와 작전 수행의 어려움 등으로 독도 망루 건설은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러일전쟁이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강제 편입을 전격 단행한다. 그동안 부정적이었던 독도관련 청원을 승인하는 형식으로 독도를 ‘竹島’라고 명명하고 시마네현 소속으로 한다는 결정을 내린것이다.
일본, 전쟁을 위해 독도를 강제로 편입
러ㆍ일전쟁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대러선전포고 원문을 기초한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인 줄 알고’ 임대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찾아온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에게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는 데 극히 좋지 않겠는가?”라고 발언 |
한편 1905년 5월 28일 인도양을 돌아온 러시아 발트함대가 울릉도를 최후 결전의 장소로 택한 일본 함대에 대패하여 결국 독도 근처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해전에서의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절감하게 된 일본은 같은 해 8월 서둘러 독도망루를 준공한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로 그해 10월 15일 예상보다 빨리 종전되자 독도망루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10월 24일 철거된다. 하지만, 독도는 당시 일본의 언론에 큼직한 사진과 함께 전승기념 명소로까지 소개되었다.
일본은 종전 직후 곧바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항거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일신협약(1907년 7월)에 이은 한·일병합조약(1910년 8월)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탈사를 마무리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05년 일본 내각의 독도편입 결정은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위한 서곡이었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