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아시나요

한국인 가미카제

shepherd2 2011. 7. 14. 15:18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여행을 다녀왔다. 

한결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 가운데 인연처럼 만난 사연 하나가 가슴에 애련하다. 

지란(知覽)이라고 하는 일본 작은 시골마을에 오래된 여관 복도에 65년 동안 걸려있는 ...

한국사람 사진 한장.  


사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沈壽官)' 도요지와 도자기를 보는 것이었다. 

여행일정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관광 안내소에 상담을 했다.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지란이란 곳을 추천하기에 그 자리에서 관광지도 한쪽 구석 맨 위에 올라 있는 '도미야여관' (富屋旅館)이란 곳에 전화로 예약을 했다. 


굽이~ 굽이~ 산길을 돌아서 도착한 지란은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그곳에 도착 하였을땐 이미 땅거미가 지고 어두워 져서 우리 부부는 여관부터 찾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인 손님이 길이나 헤매지 않을까 해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손님이라고는 우리 부부 밖에 없는 거 같았다.  오래된 조그만 여관이었는데, 현관에는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特攻隊) 사진과  '호타루(반딧불이)'에 관한 액자와 문구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관은 오래전, 한 한국사람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안 여관주인  '도리하마 하쓰요'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지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자살공격으로 악명 높은 특공대 기지가 있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도리하나 도메)가 이 집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특공대원들이 외출 나오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한국명 탁경현)라는 이도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도 면회오는 사람이 없었던 그와 모자(母子)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출격하기 전날, 작별 인사를 할 겸 찾아왔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니 내 고향 노래를 부르고 싶다" 고 했다.  눈물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앞으로 당겨서 얼굴을 가린채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한 서린 목소리로 ...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녀가 그를 위로하자, 

"만일 제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내일 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반딧불이 되어 ..."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이튿날 그는 출격했고, 태평양에 몸을 던진 그날 밤, 그가 앉아 있던 방에는 거짓말처럼 반딧불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이후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러해 전에 일본에서  '반딧불'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어머니는 식당 일을 계속하며,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혹시라도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유족들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잊혀져 가고 있는데, 사진만 저렇게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유족을 만나든지, 그의 고국으로 사진이라도 전해 주고 싶다며 ...


지금은 식당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자기와 딸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하쓰요'씨는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며 아린 얘기들을 끊임없이 가슴에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 걸려 있는 여러 사진들 사이에 빛바랜 낡은 그 사진 한 장이 애처로이 걸려 있었다.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을 그 사진이, 이국의 시골 한 구석, 가족은 고사하고 같은 피의 한국사람들 조차 발길 하지 않는 이 조그맣고 오래된 여관 벽에 65년이나 걸려 있어야하다니 ...

꽃다운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남의나라 전쟁에 희생이 된 것도 서러운데 ... 

가슴이 미어졌다.

역사의 구렁텅이에서 '가미카제'라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나갔던 그를, 누구는 친일파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울며 마지막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래였을까.  

남의나라 전쟁에 끌려가 꽃다운 청춘을 묻고, 그 영혼조차 긴 세월을 이국의 구천(九泉)에서 떠 돌아야

했으니 ...

 

암울했던 그 시대에 어찌 억울한 영혼이 그 하나 뿐이랴 !  

울음을 삼키려 고개 숙이고 부른 그의 '아리랑'이 오늘도 나의 가슴을 울린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글쓴이:  최길시 前 성남 분당중 교장 -

 
 
<후기>

일본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로 덧없는 생을 마감한 한국인 탁경현(卓庚鉉ㆍ일본명 미쓰야마 부미히로)씨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그의 고향 경남 사천에 세워진다고 일본 도쿄(東京)신문이 11일 보도했다. 탁씨는 1945년 5월 11일 일본 육군 전투기로 가고시마(鹿兒島) 기지를 출격해 오키나와(沖繩) 앞바다에서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령비 건립을 주도한 이는 친한파로 널리 알려진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田福美)씨. 그는 탁씨의 전사 하루 전날인 5월 10일 사천에서 위령비 제막식을 갖기로 하고 유족 등의 승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사천시 역시 위령비 건립 예정지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구로다씨는 17년 전 꿈 속에서 한국인 가미카제 청년을 만난 뒤 위령비 건립 작업을 시작했다. 꿈 속의 청년은 “전쟁에서 죽은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한국인인데 일본인의 이름으로 죽은 것이 한”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구로다씨는 4년 뒤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쓴 자신의 칼럼에 꿈 이야기를 소개했고 글을 읽은 야스쿠니(靖國)신사의 관계자가 연락해 야스쿠니신사 부설 군사박물관 유슈칸(遊就館)에 모셔진 탁경현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때 “(꿈 속 청년의) 유언을 유족에게 전해 넋을 달래겠다”고 결심,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2001년 일본에서는 숨진 한국인 가미카제의 약혼자와 살아남은 일본인 가미카제 대원의 사랑을 그린 영화 <호타르>가 상영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영화 속의 한국인 가미카제는 탁경현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일본 리쓰메이칸(立命館)중학과 교토(京都)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항공대에 입대, 가마카제에 차출됐다. 탁경현은 자살 공격 전 송별회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로다씨는 “한국인들이 위령비 건립에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며 “위령비를 한국과 일본을 잇는 평화의 비석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아리랑 고개 ? 에서 만난 들꽃  
사진/ 저녁노을
 

'그때를 아시나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양평동의 1968년 모습  (0) 2011.10.27
옛날 옛적에는 - (소중한자료)  (0) 2011.10.08
김완선 25년전 일본에서도 이런 무대를?  (0) 2011.04.18
옛날 장날풍경  (0) 2011.02.16
옛 음악다방  (0) 201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