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대한민국- Korea) 독도

㉑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우리는 일본을 정복했다

shepherd2 2013. 1. 23. 11:23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3-01-19 14:16:28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이 우리고대사 관련 역사서책을 수집해서 소각하고 광개토대왕비까지 변조하며 역사왜곡을 아무리 교묘히 해도 그 진위는 밝혀지게 마련이다.

  

우리역사에 관한 서책은 일본에 유민으로 건너가면서 가지고 간 것과 외국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한 논문을 통해서도 전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신황기(神皇記)나 일본 궁내성(宮內省) 문서인 상기(上記)와 다케우치 문서(竹內文書)) 등이 그 사례다.

 

이들 서책에 따르면 단군의 손이 일본에 건너갔고, 그 73대손이 진무천왕이 됐다는 내용도 이미 기술한 바 그대로다.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요시다 하치로(吉田 八郞)의 상기(上記)에 의한 계산에 따르면 일본의 진무천황(神武天皇)은 니니기노미코도(素盞嗚尊) 이래 상가야 왕조의 제73대 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같은 기록들은 한일 양국의 학자가 아닌 제3국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고조선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유민이 일본에 간 이유는 일본정복이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Gari K. edyard 교수는 346년에 선비족(鮮卑族)에 의해 멸망된 부여의 전사들 일부가 만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김해를 지나 일본의 구주로, 그리고 마침내는 야마토(大和)지방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수정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제기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아울러 존 카터 코벨 박사의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에는 우리나라 상고사와 관련된 학설이 나와 있어 주목을 끈다. 단군도, 단군 이야기도 또 가야(伽倻)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 바다를 건너 왜(일본)를 정복했다는 주장이 여기에 수록돼 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정면 부인하는 것이다.

 

제3국의 학자가 연구한 사실이기에 객관적인 시각에서 전개한 논리였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도 일찍 깬 민족이다. 석기시대부터 다른 곳에서 들어와 요동과 한반도에 제일 먼저 정착했던 토박이 주인이었다.

 

우리는 일찍부터 요동을 선점하고 이곳을 발판으로 대륙과 한반도를 두루 호령했던 민족이다.
일본에 건너간 유민(遺民)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며 가지고 간 문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의 경우는 우리의 고대 선조들이 대륙시대(大陸時代)를 풍미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우리민족은 일찍이 요동(遼東)에 정착해 살며 고대문명의 하나로 지목받는 놀라운 요하문명(遼河文明)을 낳은 위대한 민족이다. 일본에 간 유민이 일본 역사라고 하는 것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것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건너갔기에 이 문서들은 거의가 일본 열도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대륙시대의 역사다.

 

일본 역사가 아닌 일본에 유민으로 건너간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수진전(秀眞傳)은 우수한 진짜 전기역사(傳記歷史)라는 뜻인데, 상가야 왕조사의 뿌리를 증거하고 있다.

 

한민족(韓民族)은 동양문화의 창설자다

 

우리 조상은 10만 년 전인 석기시대부터 요동에 자리를 잡고 살아 왔으나 중국이 통일국가를 이루는 진시황(秦始皇)대의 만리장성과 한 무제(漢武帝)의 한사군 설치 이후 요동에서 한 반도로 밀려난다. 동시에 우리 조상들은 삼한을 이루고 일부는 일본으로도 갔다. 우리민족이 일본으로 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고, 삼국 중 후진이던 신라가 몰아낸 우리세력들이 일본에 가서 새로운 정권과 국가를 창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중국보다 문화가 앞섰다. 우리가 처음부터 중국문화를 받은 것이 아니라 중국이 우리문화를 받았다. 우리는 요동에 먼저 왔고 당시 중국에 없던 고유문화를 갖고 있었다. 우리와 중국은 밀접한 관계이면서도 언어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당시 치산치수의 기술을 가진 자는 한(韓)족 밖에 없었다.

 

이런 한족인 순(舜)을 요(堯) 임금이 딸을 둘씩이나 주어 데려간 것은 이를 증명한다. 잠시 본론을 벗어났지만 우리가 여기서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유교를 창설한 자도 한민족이라는 사실이다. 한민족(韓民族)은 인류사상 최초에 등장한 문화민족(文化民族)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문화를 창설한 자는 요(堯)가 아니고 순(舜)이었다.

 

중국사학계의 제1인자인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순(舜)을 찬양하며, 순은 동이인(東夷人)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사기(史記)에도 순이 동이인(東夷人)이라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은(殷)의 신화가 난생설(卵生說)로서 한민족의 신화와 동일하다. 은인(殷人)이 백의(白衣)를 입는 것 또한 한민족과 같다.

 

중국사가(中國史家)인 임혜상(林惠祥)과 중국문인(中國文人) 전사년(傳斯年) 등도 이 같은 동이설(東夷說)을 주장하고 있다. 또 예기단궁편(禮記檀弓篇)에 공자(孔子)가 은인(殷人)이라 지칭하고 사기(史記)에도 공자가 은인(殷人)이이라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한민족(韓民族)에 속한다.

 

요컨대 중국문화를 창출한 자가 한민족(韓民族)인 순(舜)이요, 중국문화의 총본산인 유교(儒敎)를 창설한 공자(孔子)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것이다. 동양의 문화를 창설한 민족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으나 사대주의적 발상은 이제 접어야 한다.

 

중국문화는 은(殷)에서 비롯됐다

 

이제는 당당히 역사적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위인 중에는 우리 한민족이 많다. 근세에 와서 중화민국을 주도한 손문(孫文) 역시 한민족이다. 그는 제주도 어느 섬(필자의 추론으로는 추자도가 아닌가 싶다) 출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주(周)나라 때 그 선조(先祖)가 공을 세워 하사(下賜) 받은 성(姓)이 손씨(孫氏)라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한다. 유교를 말할 때 근원이 되는 요임금·순임금이 우리 족속인 것을 맹자(孟子)도 알았다고 최태영 선생은 말하고 있다. 역사대가인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순(舜)같은 대성인(大聖人)은 후세에도 다시 출생할 수 없다”는 최고의 찬양을 하고 있다.

 

맹자 이루장(離婁章)에 순(舜)은 동이인(東夷人)이라 말하고 사기(史記)에 동이인(東夷人)이라 기록돼 있다. 이 같이 은(殷)나라가 한족(漢族)과는 상관이 없는 동이족(東夷族)이란 사실은 여러 문헌과 현대의 연구에서 일치되는 가운데 속속 밝혀지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은(殷)나라는 중국을 만드는데 선도역할을 했으며 중국문화는 은(殷)에서 비롯됐다. 은(殷)나라가 망한 이후 한(漢)나라로 합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나온 인물들인 백의(伯夷) 숙제(叔齊) 또한 그렇다. 이들의 은(殷)나라 족인 한족(韓族)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한국문화는 한국의 고유문화지 중국문화가 아니다. 철에 관해서도 중국은 제련법이 발달했으나 중국은 굽는데 반해 우리는 톱과 방짜 등 두드려 만드는 강철이 발달했다. 논농사도 구석기유물 등이 전하는 것 보다 오래다. 연천군의 구석기 유물도 그 증거다.

 

외국의 역사학자인 존 코벨과 알란 코벨 모자는 요동과 한반도 일대청동기시대에 이미 우수한 종족들이 선주해 있었음을 알고 한국이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별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단군의 실재와 존재를 간파해 냈다.

 

그는 강화도 마니산에서 단군의 천제를 지낸 사실을 확인한 뒤 현대의 강화도 천제를 참관하고 현존하는 단군조상을 미술사 적으로 논한 글을 남겼다. 즉,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1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이 땅에 살았던 인류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유럽족인지 몽골족인지 혹은 또 다른 인종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지녔던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러나 단군시대에 와서 이런 것들이 보다 분명해진다. 서기전 2천 수백 년 전에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들이 이 땅에 군림했다는 사실이 단군이야기로 응축해 전해진 것이다”

 

이러한 단군이야기에서 학자들은 고대 고조선이 지금의 중국 산동 반도까지 퍼져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인류 출현은 3만~10만 년 전이었다

 

고고학자들이 한반도에 인류가 처음 출현한 것은 3만 년 전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은 중국보다 빙하기의 피해를 덜 받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10만 년 전, 초기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는 주장이 나온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는 BC3천년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이런 토기는 시베리아를 가로 질러 스칸디나비아와 핀란드에 걸치는 지역에서 발굴되는 도자기와 그 형태나 타입이 비슷하다. 빗살무늬를 만들어 쓴 사람들은 제2의 거대한 민족이동에 관련된 인류들이다. 물론 고대 한반도 살았던 인종이 다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석기시대에 1차와 2차에 걸쳐 한반도에 진입한 인류는 백인종인 코카서스인종들이었다. 오늘날 한국인의 용모에 이런 코카서스인종의 종족적 특징이 남아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보통 이마가 높고 콧날이 길고 곧바르며 콧마루가 높고 안색이 밝다. 우리와 핀란드인이 한 형제라는 사실은 지금도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BC1500년경 중국적인 요소가 침투했고 그 자취를 남겼다. BC700년 경에는 또 다른 종족이 오르도스-만추리아 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합치면서 청동기시대가 열렸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고유한 민족이지만 BC 몇 세기 동안에는 여러 종족들과 피를 나누는 뒤섞임이 있었다.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일본의 조작된 말이다. 한국어는 발음으로나 문법구조가 중국어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며, 언어학상 퉁구스어족으로 구분된다. 이 어족은 아시아를 지나 멀리 터키와 헝가리 및 핀란드를 포함한 언어계통이다. 단군의 제단과 천제의 유습은 지금 북한 땅에 남아있다. 그러나 남한의 단군 추종자들은 강화도 최북단의 참성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올린다.

 

일본은 한국인이 건설하고 문화도 한국에서 간 문화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련성에 있어서 존 코벨과 알란 코벨 박사는 4세기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복 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본이 말하는 미마나론(任那論)이나 한반도설을 뒤집고 그리피스의 글과 개리 레저드 컬럼비아대학교수의 주장을 더 발전시킨 것이다.

 

일본에서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1948년에 기마민족설을 주장했다. 코벨 모자는 이를 증명하는 예로 말 유물 유적과 일본 이소노가마(石上) 신궁의 칠지도(七支刀)를 언급한다.

 

최태영 박사는 이 칠지도(七支刀)가 실전에 사용한 무기가 아니고 백제국왕이 일본을 정벌하러가는 장군에게 주어 선두에 들고 진군한 전기(戰旗)같은 징표라고 주장한다. 코벨 박사도 그것은 바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그의 친족 신공(神功)에게 내린 징표라고 단정하고 있다. 코벨박사는 신라의 금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장식의 상징과 흔들리는 소리에 무속문화(巫俗文化)의 묘미가 있다는 것을 밝혀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코벨박사는 1천 수백 년간의 지배이념이던 불교에서도 그 저변에 무교(巫敎)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는 그가 대단히 명석한 학자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또 코벨박사는 일본에서 자랑하는 국보가 모두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그는 정신사(精神史)를 알았다. 코벨박사는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간 문화며, 그리고 일본 국 건설은 우리 한국인이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코벨박사의 이 같은 연구는 중국과 일본이 역사왜곡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중 학자가 아닌 제3국학자가 보는 한일고대사론(韓日古代史論)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고 값진 것이다. 지금 우리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기자조선과 (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우리역사가 아니다. 다음에 그 왜곡의 반론을 제기하려고 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