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싶은 추억의 노래

사의찬미 / 윤심덕

shepherd2 2013. 2. 19. 19:51
Picto infobox music.png
윤심덕
Youn Shim-Deok.jpg
기본 정보
출생 1897년 7월 25일(1897-07-25)
조선 조선 평안북도
사망 1926년 8월 4일 (29세)
일본 일본
국적 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직업 성악가, 가수, 배우
장르 서양 고전음악, 대중가요
활동 시기 1924년 ~ 1926년

윤심덕(尹心悳, 1897년 7월 25일 ~ 1926년 8월 4일)은 일제 강점기성악가이자 가수배우이다. 화가 나혜석과 함께 1920년대의 신(新)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1] 한기주(韓琦柱)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다.[2]

생애[편집]

평양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남포로 이주하여 자랐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언니와 여동생은 이화학당을, 남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의 형제들은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이고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성악가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서 주최한 도쿄 음악학교 동창회의 음악회에서 피아노 듀엣곡의 일종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던 윤성덕이 동생이다.

윤심덕도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에는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녔다가, 음악 공부에 뜻을 두었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간 뒤,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라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3] 1921년에는 유학생들이 계획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학생인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교사로 임용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혼담이 깨지는 등 개인적인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부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로 도피까지 한 끝에,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 일하게 되었다.[4] 한국 최초의 대중 가요로 꼽히는 〈사의 찬미〉를 녹음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에 갔다가[5] 한 윤심덕은 그해 8월 3일에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했으며,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자살하였다.[6]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우리 카페의 이름 '사의 찬미' 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이며, 신여성이며, 불꽃같이 살다 간

윤심덕의 노래(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김우진의 가사)입니다. -유토피아 -

 

사의 찬미(死의 贊美)》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8월에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발표한 음반이며 이 음반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타이틀곡은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이다.

한국어 가사는 윤심덕이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어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흔히 〈사의 찬미〉를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죽음을 찬미하는 내용의 가사처럼 이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곧 귀국길의 현해탄에서 연인 김우진과 함께 자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윤심덕-사의 찬미(1926)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건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이 노래는 윤심덕의 비극적인 동반 자살 이후 많은 인기를 끌었고,

자유연애 사조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잡았다.

본래 왈츠이기 때문에 경쾌한 곡조이나 느리게 연주하여 처연하고 비극적인 느낌을 살렸다.

 

 

 

1991년에 영화감독 김호선이 윤심덕과 김우진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이 노래의 제목에서 따온 《사의 찬미》라는 제목을 붙였다.

 

불꽃처럼 살다간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

관비장학생으로 동경대학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은 김우진, 홍난파 등과 교류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펼치지만 염문설에 휘말려 크나큰 정신적 고초를 겪기도 한다.

결국 윤심덕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한 듯 ‘사의 찬미’라는 명곡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는 얘기다.

 

김호선 감독은 데뷔작 <환녀> 이래 각박한 현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 여성상을 묘사하는데 주력해 왔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유행가에 불을당긴 노래이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본유학까지 마친
음악엘리트였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유명한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같이 정사한 김우진이 작사한
허무와 염세로 가득한 노랫말을 붙여 취입한 것이다.

이 곡은 희망가와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희망가의 가사가 희망적인 것에 비해 허무, 염세주의의 가사였고
또 하나는 희망가는 무반주였지만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동생의 피아노 반주가 들어간 음악 이였다는 점이다.

 

 김우진


윤심덕은 이 노래를 녹음한 직후
그의 애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귀국 길의 관부연락선 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자살한
스캔들로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 센세이션으로 인해 그때까지 미미하기 그지없었던

 


축음기(하드웨어)와 음반 (소프트웨어)시장이
일거에 열림으로써 일본의 음반산업자본은
식민지 시장을 확보하는 교두보를 쌓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투신자살은
당시의 봉건적 사회분위기에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유연애 관을 공공연하게 피력했던 매력적인 신여성,
그리고 이미 가정이 있는 와세다대학의 엘리트가 죽음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한 것,
그리고 그런 결단을 암시하는 듯한 <사의 찬미>의 비극적인 가사는
암울한 식민지의 대중들의 마음을 극적으로 달아오르게

 

 

                                                                 

 

'듣고싶은 추억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사랑 / 신계행  (0) 2013.09.02
원 / 오현란  (0) 2013.04.05
아득히 먼곳/양혜승  (0) 2013.02.02
듣고싶은 최희준 노래모음  (0) 2013.01.13
누가울어 / 임태경  (0) 2012.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