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갔을 당시 의대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자원 봉사를 나간 곳이라 합니다. 이후 몇 나라를 더 돌아 다니다가 UTMB(University of Texas Medical Branch)에서
의사 및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은퇴를 하고
교회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수업 등의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재에는 그동안 다녔던 30여개국이 넘는 나라들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된 기억들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서 몇장의 지금의 한국 사진과 영상을 보여 주었더니 한번 가보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서 이젠 여행하기 힘들 거라며 웃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빛 바랜 칼라사진들이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네요...
100여장이 넘는 한국전쟁 후의 대구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만,
블로그 한 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일단 몇 장만 올려 봅니다...
올라와 있는 모든 사진은 Adam이 사용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1954년 대구의 사진들입니다.
싸구려 필름 스케너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130장 정도의 슬라이드 필름을 스켄하는데 5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학생인 저로서 5시간의 투자는 큰 것이죠,
물론 50년동안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던 Adam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지만요....
왼쪽이 Adam이고 오른쪽은 친구인 burkholder라고 써 있네요...
Jeep 찝 차를 타고 가다가 전복 사고를 당한 후
대구의 한 군병원에서 치료 후 기념으로 찍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진과 비교했을 때 눈빛이 강렬하군요...
미국 원조물품이 도착하자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현수막을 들고 환영하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전쟁고아들을 위한 행사라고 하는데...
고아가 아닌 듯한 사람들도 많이 보이는군요....^^;
Outdoor Meeting 야회 집회라고 써있는 사진입니다...
Adam 아담의 말대로 모두가 검은 머리에 흰옷을 입었습니다...
대구 복현동 부근 고아원 어린이들이 달성예배당 앞에서 선물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편 멀리 보이는 붉은 건물은 경북대 과학관이며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사람이 Adam씨이다.
Adam의 목에 걸린 사진기가 이 대부분의 사진들을 찍은 사진기입니다.
기종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Adam 아담은 저 한복을 입은 여자 아이가 인상 깊었다고 합니다...
좀 사는 집 자제분들 같군요.. 비로도(?) 치마와 양장(?)을 한 자매들입니다..
피난민촌의 우유를 마시는 또다른 사진이군요....
개인적으로 사진속 분들의 지금 근황들이 궁금해집니다...
사진의 제목이 'boy wearing only rubber shoes' 입니다...
신 외에는 아무 것도 걸친 것 없는 벌거벗은 아이.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제 어렸을 때도 저러고 다니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던 기억이...
그 당시 보기 드물었을 거 같은 직업여성이군요...교통정리 아가씨....멋지네요...^^;
Adam의 사진중 유일한 흑백사진인 김치독들의 사진입니다...
공동으로 사용한 장독대 같은데...
그 당시에는 남의 것 슬적 하는 일은 없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돼지 팔러 장터로 가는 한 아저씨의 사진입니다...
사진속의 아가씨는 Louis Khans 루이스 칸스 라고 하네요....
서양 자동차와 서양 아가씨의 모습에 동네 아저씨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좀 민망한 듯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네요....
대구에 있는 한 유치원 이라고 합니다... 일본식 건물이 눈에 띄는군요....
그래도 저기 계신 분들은 그 당시 여유가 있으신 분들의 자제들이겠군요..
마을에 있는 공동 화로에서 분유를 데우고 있는 사진입니다...
놀이터 사진입니다......
소시장에서 소의 상태를 보시는 아저씨의 미소가 ...... 좋아보입니다...
소시장에서 만난 큰 모자(삿갓)를 쓴 아저씨가 Adam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소시장 사진의 담배대를 파는 상인입니다...
유치원 사진이라고 써 있네요....
분유를 데우고 있는 모습...
피난민촌에서 분유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
피난민촌의 전체 풍경...
분유 배급중입니다....
이 사진에는 부산이라고 써 있네요.... 어딘지는...
정확히 상표는 모르겠지만 빈 맥주켄을 사용하여 만든 지붕입니다...
전쟁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사진입니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구호품을 많이 날랐다고 합니다.
60트럭과 디자인은 같은데...
저도 군대시절 운전병이라 60 몰았던 기억이...(제3야수교출신 ㅡㅡ;)
장터로 가는 길일까요? 흰 옷의 행열
갓에 도포를 두른 할아버지와 포대기에 아이를 업은 어머니...
구호물품 중 옷을 받기 위해 모여 있는 모습입니다.
평온해 보이는 농가의 풍경....
모내기를 하는 건지 모종을 관리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1954 대구에서 2007 Galveston 으로.. KOREA 2007/02/09 17:29
참 정신 없던 지난 몇일이었습니다.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던 한적한 제 블로그를 들어간 3일 전
믿을 수 없는 방문 횟수에 네이버에 오류가 생겼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터넷 신문에 제 블로그가 올라간 것을 알게 되었고.....
첫날 2500명 이상의 사람들....
둘째날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아 주었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말 못할 감정을 어설픈 제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준 것입니다. 수많은 방문과 댓글...
다행이 악플 하나 없는 댓글과 Adam선생님에 대한 감사 인사,
사진을 올린 저에 대한 격려로 아내와 저는 많이 흐믓해 했습니다.
그런 중에 대구의 매일신문과 대구KBS에서 연락이 왔고...
먼저 저에게 연락을 하신 매일신문의 사진부 안기자님에게
사진과 내용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참 보기 힘든 우리나라의 근대사 사진, 더군다나 컬러인 사진...
맘 같아서는 1954년 이후 한국을 잘 모르시는 Adam선생님을 한국에 초대하고 싶었으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 저의 입장이......ㅡㅡ;
한국 사람의 방문이 많지 않은 이곳 Galveston에서 기회가 있으실 때마다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고,
한국의 발전을 보고 듣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제가 할수 있었던 건 몇 장의 최근 한국 사진과 관광공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짧은 홍보 영상물을 DVD에 녹화해 댁에서 보여드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매일신문사에서 온 감사편지를 프린트해서 보여드렸습니다.
이 공돌이가 리포터 흉내를 내며 인터뷰 하는 사진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서재에서 보여드리고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아뿔싸... 모뎀을 쓰고 계셨습니다... 한 페이지 보는데 10분 이상....ㅡㅡ;
이날 인터뷰를 같이 한 동네 한인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다시 한번 Adam 아담과 Alice 앨리스에게 감사 드립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참 욕심 없으시고, 검소한 삶을 사시는 분들입니다.
관련기사 - 대구매일신문 (2007년 2월)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이 5일 서울 시립대박물관에서 열렸다.
서울시립대 박물관은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입수해 공개했다.
이 사진들은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군(속) 또는 사진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280여장의 컬러 사진들은 한국전 후 일상을 되찾아가는 서울풍경이 담겨 있다.
군용천막으로 지어진 천막촌 옆에 펼쳐진 남대문 시장풍경,
창문 유리창은 없지만 건물외양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중앙우체국 건물, 등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사진은 서울시립대 박물관에서 ‘1950’s 서울의 기억’ 이란 제목의 전시회를 통해 9월 30일까지 일반에 공개된다. (02)6490-6587. 영상팀 [서울시립대 박물관]
♠1959년~1960년대의 서울 ♠
1959년 4월 남대문로
1959.4.4 거리에서 파는 냉차 행상. 한 어린이가 시원한 음료수 한병으로 목을 축이는 중학생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1959년 1월16일 을지로2가에서 차량이 충돌해 길가 한가운데 나뒹굴고 있다.
1959년 1월6일 새해를 맞아 첫 출근하기 위해 열차편으로
상경한 근로자들이 서울역사를 나서고 있다.
1959년 3.1절을 맞아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 기념식을 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학생들이 종로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3.1절을 맞아 기념식을 갖고 참가자들이 학생 밴드부를 선두로 종로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서울역앞.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행인들이 입을 막은채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고 있다.
1959년 3월1일 여자어린이들이 덕수궁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3.1운동 발상지. 서울 세브란스병원 부근. 남대문로 5가 15-75번지
1959년 3월1일 종로의 탑골공원과 낙원동 일대
1959년 3월 20일 명동성당이 보이는 명동 일대
1959년 3월 20일 명동성당이 보이는 명동일대 전경
1959년 4월8일 서울 종로2가 보신각
1959년 4월8일 서울 종로2가의 화신백화점 과 신신백화점
(왼쪽.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건물자리)
1959년 4월8일 원구단 방향에서 바라본 조선호텔의 옛모습. 1970년에 헐리고 이 자리에 현대식 고층건물(롯데호텔)이 들어섰다
.
1959년 4월8일 조선호텔과 원구단.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조선호텔의 옛모습과 팔각정 형태의 원구단
1959년 3월 중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 부모와 함께 교모와 교복 가방을구입하고 있다
.
1959년 3월1일 허니문 카를 본따서 만든 이동 어린이 놀이기구가 인기를 끌고 있다
.
1959년 3월2일 50년대 말 명동거리의 패션. 양장차림의 서양여인과 한복차림에 쪽진 머리의 한국여성이 대조적이다
. 1959년 3월3일 풍문여자중고등학교의 졸업식이 거행되고 있는 교문밖에는 꽃다발 행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59년 4월 4일 냉차, 아이스크림 등 거리의 노점상들이어린이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군것질을 팔고있다.
1959년 4월 6일 유치원생들과 학부모
1959년 4월12일 창경원 벚꽃놀이
1959년 4월12일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기기 위해 입장을 기다리는 시민들
1959년 4월14일 비가 내리는 광화문의 한 가게 앞에 비닐우산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1959년 4월14일 우량아선발대회에서 한 심사위원이 참가한 어린이들의 앉은키와 몸무게 등을 재고 있다.
1959년 4월18일 덕수궁에 놀러나온 여자 어린이들
1959년 4월15일 급수 리어커가 오면 물동이로 길어나르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15일 수돗물 사정이 좋지않던 시절 급수 리어커가 오면물동이로 길어나르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 남대문로
1959년 4월 소공동 환구단(원구단) 주변 모습. 환구단 뒤로 반도호텔이 보인다. 환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을 가리킨다.
1959년 4월의 돈암동. 낮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1959년 4월 을지로 입구. 도로에는 버스와 전차가 다니고 있다.
1908년 8월 일제가 설립한 경성동양척식주식회사. 위 사진 오른편에 이 건물 모습이 보인다.
경성동양척식 주식회사 지금은 외환은행 명동본점 건물이 들어서있다.
1959년 4월 종로거리
1959년 8월 미아리 동네 모습. 대체로 낮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다.
1959년 광화문 사거리 주변 모습. 사진 왼쪽에는 서울 시민회관이 건축중이고, 뒤쪽 가운데에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의 모습이 보인다.
1959년 남대문로 주변 모습.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1959년 명동거리 모습. 명동거리는 50년대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959년 서울 중심가 건물 앞에 주차된 다양한 모습의 차량들
1959년 기존의 목조건물을 헐고 준공되어지고 있는 창성동 별관 정부청사 신축지 현장
1959년 명동거리
1959년 서울 을지로 입구. 오른편 맨 윗쪽 끝 건물이 서울시청
1959년 종로 거리. 건물들 사이에 보신각이 보인다.
1959년 종로 거리. 오른편 건물이 화신백화점.
1959년 종로 대로변 모습. 전차가 지나고 있다.
1962년 10월 공사중인 김포국제공항. 1958년 1월 국제공항으로 지정되어 1959년 종합청사를 신축하고 그후 각종 시설의 확충과 기능을 확대하였다.
1962년 3월 서울 명동에 신축중인 유네스코회관 빌딩
1962년 3월 서울 중구 명동에 유네스코회관 빌딩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유네스코회관은 1959년에 착공해 1967년, 8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1959년 4월30일 봄바람을 즐기러 강변으로 외출 나온 주부들.
1959년 5월8일 부랑인 일가족이 종로거리에 누워 구걸을 하고 있다.
1959년 5월12일 제13회 어린이건강심사대회에서 입선한 우량아의 부모들이시상식에 참석해 수상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959년 5월23일 미스코리아와 미스해병 등으로 선발된 미녀들이오픈카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1959년 5월28일 관광업계는 관광객유치를 위해 관광용고급버스를 구입하고 관광버스 시운전 행사를 했다.
1959년 5월29일 자전거 위에 올라가 제1회 국제마라톤 경기대회 골인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의 모습.
1959년 5월6일 바느질과 다림질 등 재봉일을 하고있는 50년대 말의 주부들 방안에는 화로도 있다.
1959년 7월 27일 지방선거로 야당의원들이 데모. 서장과 맞붙잡은 김두한 의원
1959년 7월 27일 지방선거로 야당의원들이 데모.
1959년 8월4일 서울 미아리 일대의 50년대 말 모습.
1959년 8월 21일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1959년 8월 21일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1959년 8월 26일 야외가설 무대에서 공연중인 시민위안의 밤 무대
1959년 8월 미아리 동네 모습. 대체로 낮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다.
1959년 8월31일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된 명륜동 주택가 상점 앞을 지나는 주민의 모습
1959년 8월31일 장마로 물이 불어난 청계천벽 천일극장 뒷편에 밀집한 판자촌의 모습
.
1959년 8월4일 여성 피의자가 재판을 받기위해 포승줄에 묶인채 호송관에 끌려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1959년 9월16일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서 줄을 이루고 있는 귀성객들.
1959년 9월16일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서울역의 귀성객들이 광장에 줄을 이루고 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모델을 둘러싸고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1959년 9월1일 좋은 앵글의 작품사진을 만들기 위해
1959년 도로 공사 모습
정간 당했던 경향신문이 1959년 6월 26일 다시 속간케 되었음을 알리는 대자보가 경향신문 사옥 앞의 게시판에 나붙었다.
정간당했던 경향신문이 1959년 6월 27일 조간부터 속간케되었다.직원들이 그동안 내려졌던 사기를 사옥 옥상에 다시 게양하고 있다.
1962년 1월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
1962년 1월 시민들이 출근을 하기위해 줄을서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다.
1962년 1월 광화문 아카데미극장 매표소 앞에 영화를 보기위해 나온 시민들의 줄이 이어져 있다.
1962년 1월 눈오는 세종로 거리에 펼쳐진 좌판에서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있지만 시민들은 무관심한채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1962년 창경원(현 창경궁) 수정궁 앞 연못이 얼어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겨울을 즐기고 있다.
1962년 기찻길 옆으로 판자집이 즐비한 가운데, 아이들이 철로에서 놀고 있다.
1962년 청계천 주변 판자촌
1962년 추운 겨울 세종로에 상주하는 한 노숙자가 근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1962년 기찻길 옆으로 판자집이 즐비한 가운데, 아이들이 철로에서 놀고 있다.
1962년 서울 시내버스 여성 버스차장 모습. 대중 교통수단인 모든 버스에는 여성 버스차장이 근무해 운임 수납 업무와 손님의 승하차를 통제하는 등 안전운전을 위한 보조역을 했다.
1962년 서울 청계천 주변 길가에서 넝마를 줍고 있는 사람들
1968년 6월 도로확장 공사가 되기 전의 효자동
1968년 7월15일 중학입시 무시험 발표
1968년 10월12일 종로3가 창녀촌
1968년 10월1일 서울 모습
1968년 10월1일 서울시청 주변 모습.
1968년 10월5일 초만원을 이룬 추석 귀성열차
1968년 8월24일 악명높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행방불명)
1968년 10월 17일 정강자씨 등 젊은 미술가들이 한강변에서 전위예술을 공연하고 있다.
2003.8.26 한국 최초 행위예술가 정강자. 가수 남일해 누이동생이다.
1968년 11월 29일 운행 70년만에 폐차 처분되어 차고에 몰려있는 서울의 전차
1968년 11월 3일 새벽 3시30분 대구시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큰 불.아래 왼쪽이 계성고등학교
서문시장 제3지구 1층에서 연탄 과열로 큰 불. 멀리 동산병원 본관 건물이 보인다.
1968년 봉천동 꼭대기 까지 차곡차곡 들어차 있는 가옥들
1968년 봉천동 주민들이 마술단 공연을 보기위해 공연장 앞에 줄을 서 있다.
1963년 9월 7일, 자하문으로 가는 청운동 언덕길을 달리던 서울 시내버스가 때마침 휘발유를 가득 싣고 고갯길을 내려오던 트럭에 들이받혀 인근 가옥과 충돌하는 바람에 길에서 놀던 어린이 5명중 2명이 즉사하고 승객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사고 피해자는 대부분 하교하던 학생들이었다. 사진은 사고현장의 모습
사고현장에 학생들의 가방이 길에 나뒹굴고 있다.
사고현장의 부서진 버스의 내부 모습
사고현장의 부서진 트럭과 버스의 잔해
효자동 야간 도로공사. 대낮의 교통불편을 막기위해심야에 도로포장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인부들
60.4.19 서울 효자동 전차종점에서 경무대로 꺾어 올라가던 데모대가경찰의 무차별 총격을 받고 100여명이 흩어졌다.
1960년 4월 29일 학생데모대가 경무대로 가는 것을 경찰이 최초로 발포한 곳이다. 해무정 앞 지금의 종합청사와 국립박물관 사이 효자동으로 가는 길
서울 효자동 전차종점에서 경무대로 꺽어 올라가던 데모대가경찰의 무차별 총격을 받고 100여명이 쓰러졌다
1968년 6월 도로 확장공사가 되기 전의 효자동
95,10,22 금융실명제 실시후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세일에 나선 괴자금과 5-6공 비자금의 연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치자금 보관소로 애용되었던 상업은행 효자동지점
아래의 사진 게시물은 1950년대 말 ~ 1960년대 중반까지 주한미군의
군속으로 근무하였던 Leroy Smothers씨가 한국에 근무하면서
남한의 여러 곳에서 찍은 8mm 비디오카메라 또는 35mm 스틸사진을
그의 아들 Bill Smothers씨가 스캐닝하여 그의 웹사이트에 올린 것을 발췌하였다.
50~60년대의 서울의 어느 시장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고 칼러사진으로 찍은
모습은 따뜻하고 정다운 느낌을 준다.
1960년대서울풍경
*1967년의 한국영화*
아래 영화 포스터들은 정확히 1967년 국내에서 상영된 한국영화의 포스터들이다. 흐르는 곡은 가수 남진의 데뷔곡이자 당대 최대의 히트곡 가슴 아프게인데 남진 의 곡을 구할 수 없어, 그의 라이벌이었던 나훈아의 노래로 실었다
가 심박님의 도움으로 다시 남진의 노래로 바꾸었습니다. 심박님, 땡큐 ~ !!!
솔의향기는 그 해 고딩생활을 접었다지...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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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내외가 영식 지만군과 함께 서울시청 앞 지하상가 개점식에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박대통령 옆에 서있는 사람이 김현옥 전 서울시장. 북괴의 위협이 노골적이던 당시 대피소 겸용으로 지하도가 생기고 상가가 조성되어 이날 개점식을 가졌다. 지하상가가 드물던 시기에 생긴 시청앞 지하상가는 대통령 내외까지 참석할 정도로
고급 쇼핑명소로 각광을 받기도. 극심한 경기침체로 종로4가, 신당 등 중심지 지하도 상가 점포가 모두 철시해버린
지금 상상이 어려운 장면이다.
‘국민가수’ 패티김과 지금은 고인이 된 길옥윤 커플.
열사의 나라 베트남에 참전한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에서 열린 위문공연에서 길옥윤의 기타반주에 맞춰 패티김이 열창하고 있다. 두 사람은 60, 70년대 콤비를 이뤄 ‘서울의 찬가’, ‘이별’, ‘초우’, ‘사랑해 당신을’, ‘살짜기 옵서예’ 등 주옥같은 히트곡으로 가요계를 풍미했다. 특히 ‘이별’은 일본, 동남아에서도 히트, ‘아시아의 애창곡’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들 커플은 인기 절정기인 66년 결혼해 화제를 모았으나 7년 뒤 이혼,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평양고보와 서울치대 전신인 경성치과전문을 나온 길옥윤은 50년대 서양음악의 물밀 속에 한국적 색깔을 접목시켜 트로트 위주의 대중음악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미8군 무대에서 팝을 부르며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패티김은
풍부한 성량과 카리스마 넘치는 대형가수로 사랑을 받아왔으며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무대에 서고 있다.
67년 겨울, 일선 장병 위문차 전방 마을에 도착한 영화인들.
당대의 톱스타들이 총 출동한 듯 하다. 맨 왼쪽에 김진규, 가운데 선그라스를 낀 신영균, 그 좌우에 고은아, 문희 그리고 허장강, 장동휘, 신성일, 박암 씨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는 ‘초우’ ‘역마’ ‘안개’ ‘메밀꽃 필 무렵’ ‘갯마을’ ‘싸리골의 신화’ ‘섬마을 선생님’ 등 수준높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던 ‘한국 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던 시기로 이들 외에도 윤정희, 남정임, 최은희, 김지미, 최무룡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동시대에 활약했었다. 큰 구경거리가 생긴 듯 몰려 나온 ‘부대 마을’ 주민들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 그리고 구식 버스와 검정 지프차가 옛 추억을 되살린다.
한강로와 이태원, 용산구청앞 길을 경부선 철길 넘어 고가차로로 잇는
삼각지 입체교차로가 준공되어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영식 지만 군이 김현옥 서울시장
(손으로 가리키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둘러보고 있다. 삼각지 교차로는 90년대 초반 헐리고 대신 사거리가 조성되어 양쪽 도로가 직선으로 뚤렸다.
(67년 12월 27일)
마지막 중학교 입학시험.
문교부가 69학년도 중학 신입생부터 무시험입학제를 실시
(서울 외 지역은 70년도부터)키로 결정하여 서울지역에서는 마지막 입학시험(전기 모집)이 12월 1일 치러졌다. 당시 중학교는 전기, 후기 두차례로 나눠 신입생을 모집했으며 전기 불합격자는 후기 모집 중학교에 또 한번 시험 칠 기회가 주어졌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초등학교 6학년 수험생이 한 문제라도 더 풀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이 안쓰럽다.(67년 12월 1일)
입시 2일째인 체능고사 시험장.
엄숙한 표정의 감독관과 가슴에 수험표를 단 수험생들이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팔굽혀펴기 종목이 진행되고 있다. 총점 800점 중 체능은 20점에 불과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학교의 경우
1, 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도 하여 팔굽혀펴기 한 개라도 더 하기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체능고사는 100m 달리기, 턱걸이, 팔굽혀펴기, 공던지기
(요즘은 종목조차 없어진 연식 야구공 사용) 등 4 종목 각 5점 만점으로 치러졌다.(67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