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정부가 땅 투기 앞장섰다?…‘평당 200원’ 강남 언제·왜 비싸졌나 [사-연]

shepherd2 2023. 11. 5. 09:01

정부가 땅 투기 앞장섰다?…‘평당 200원’ 강남 언제·왜 비싸졌나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입력 2023. 11. 5.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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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서울의 인구는 5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북구와 영등포구의 인구가 100만 명까지 증가하며 기존의 행정구역을 다시 정비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1973년을 7월을 기해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구되었습니다.

1975년 10월 강남구청 개청식이 열리고 있다. [매경DB]
강남 역시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73년, 영등포구에 속해 있던 반포, 잠원, 서초, 양재 등이 성동구로 편입되었습니다. 또한 1975년 또 한 번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한강 이남의 성동구가 분리되어 강남구가 신설되었습니다. 한강 이남의 지역을 뭉뚱그려 지칭하던 ‘강남’이 ‘강남구’라는 번듯한 이름을 가진 구로 탄생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의 강남구는 서초, 강남, 송파, 강동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범위였습니다. 강동구가 강남구에서 분리된 것은 4년 후인 1979년이었고 1988년에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구되었습니다.
1975년 강남구가 성동구로부터 분구한 가운데 강남구청 관계자가 구 연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남구청]
영동지구 개발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게 되면서 강남의 인구 증가는 눈에 띄게 두드러졌습니다. 1975년 강남구 신설 당시 32만 명이었던 인구는 1985년 77만 명, 1987년 82만 명으로 십여 년 만에 세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이는 강북 도심 인구였던 77만 명을 넘어서는 수치였습니다. 강북의 팽창과 인구 밀집을 해소하기 위해 개발되었던 강남은 개발이 시작 된지 20년이 채 되지 않아 강북보다 비대해지게 되었습니다. 강남은 어느덧 서울의 부도심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밝은 곳에는 언제나 그늘진 면이 있듯, 강남의 개발사에서도 눈부신 성과 반대편에는 어두운 이면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암적인 부분은 아마 부동산 투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영동지구에 불어 닥친 부동산 투기 열풍, 그 욕망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 국가권력
1960년대 강남이 황무지였을 시절, 이곳의 땅값은 얼마였을까요. 현대건설의 사보 <현대>에 따르면, 1967년 압구정·신사·잠원 일대의 땅값은 평당 200원 정도였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 담배 한 갑이 50원 전후였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금액이었죠. 강남 부동산이 크게 뛴 첫 번째 계기는 제3한강교의 개통이었습니다. 다리가 놓여 통행이 원활해지자 평당 몇 백 원이었던 땅값은 삼천 원을 호가하게 되었습니다. 연이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과 함께 땅값은 평당 만원에서 만 오천 원까지 폭등합니다.
1976년 12월 강남구 삼성동에서 강남소방서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강남구청]
다음은 1970년부터 77년까지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을 역임한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의 증언입니다. 그는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권에서 강남 개발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권 차원에서의 강남 토지 매입 사건을 함께 서술합니다. 1970년 1월,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윤진우 도시계획과장을 호출합니다.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영동 개발지를 한 바퀴 둘러본 둘이 향한 곳은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의 사저였습니다. 박 실장은 윤 과장에게 오늘 본 지역 중 어디가 유망한지를 물었고, 윤 과장은 탄천 서쪽 지역이 유망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바로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 일대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1971년 3월 도산대로 일대 개발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1975년 6월 촬영한 도산공원의 전경.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묘소가 있는 이 공원은 그의 호를 따 도산공원으로, 이 앞을 지나는 길 역시 도산대로로 명명되었다. [강남구청]
국가권력 차원에서 강남 부동산에 투기하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비자금으로 논밭이었던 영동지구 땅을 싸게 매입해 둔 다음, 정부나 서울시 차원에서 그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의 대규모 개발계획이나 정책을 발표합니다. 개발정보를 듣고 민간 투기업자들이 달라붙어 부동산 시장이 뜨거워지면, 그때 몇 배의 차익을 남기고 땅을 파는 방식이었습니다.
1975년 11월 탄천 위 삼성교가 건설되고 있다. [강남구청]
박 실장의 지시를 받은 윤 과장은 바로 다음 달부터 행동을 시작합니다. 청와대로부터 넘겨받은 12억 8000만 원으로 강남구 삼성동 일대 땅을 야금야금 차명으로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사 모은 땅의 면적이 무려 25만평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서울시는 영동지구 개발계획의 전모를 발표합니다. 땅을 매입한지 정확히 1년 뒤인 1971년 초, 땅의 가치는 20억 원에 달했습니다. 고작 한 해가 지났는데 두 배 가까이 가격이 뛴 것이었습니다. 1970년 20억이라는 돈은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5천억 원에 달하는 거금입니다. 부동산을 매각한 돈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자금으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투기의 역사는 반복된다
1970년대 영동지구 부동산 투기는 국가권력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기업가, 고위관료나 공무원, 개발업자와 건설사 임직원 등 서로 다른 사회 구성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부동산 투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사전에 정보를 접한 이들은 부동산을 통해 막대한 차익을 벌어들였습니다. 몇 해 전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광명시흥 3기 신도시 예정지 부동산 투기 사건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주범도 정치인, LH 임직원, 지자체 공무원들이었고, 투기 방식 역시 사전정보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투기의 역사는 똑같은 수법을 통해 반복되고 있습니다.
1980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 영화 <복부인>. 아파트 청약에 당첨돼 큰 돈을 번 주부가 향락을 즐기다가 사기를 당하게 되는 내용으로 배우 한혜숙,박원숙,김애경 등이 출연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이 시기 등장한 신조어가 ‘복부인’이라는 말입니다. 본인의 체면을 생각해 투기에 전면적으로 나설 수 없던 고위직들은 부인과 딸을 앞세워 그들로 하여금 영동지구 부동산 시장을 누비게 합니다. 복부인들의 전형적인 투기 수법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무더기로 아파트 청약을 해 당첨 확률을 높이고, 당첨되면 분양가보다 비싸게 되팔아 차액을 남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개발지역이나 아파트 분양지에는 복부인들이 타고 온 고급 승용차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녀들의 핸드백 속에는 거금의 수표와 현금 다발이 가득했었다고 전해집니다.
1981년 2월 반포와 논현동 일대 주택단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1981년 5월 강남역사거리 일대 개발 공사가 진행중이다. [강남구청]
1980년대 들어서는 중산층에까지 부동산 열풍이 번지게 됩니다. 강남의 새 아파트들은 청약만 된다면 무조건 차익을 거둘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무주택자만 가능한 청약에서 유주택자들이 친인척들의 명의를 빌려 넣는 편법은 흔했고, 동사무소 직원에게 뒷돈을 주고 자격 조건이 가능하도록 서류를 조작해 청약에 당첨된 사건이 적발되기까지 합니다. 이 시기에는 ‘떴다방’이나 ‘파라솔 부대’같은 이동식 부동산 중개업소까지 등장하여 현장에서 분양권을 거래하는 방식이 성행했습니다.
반포 아파트가 ‘내시촌’으로 불린 사연
1972년 10월 상공에서 바라본 반포 일대 주공아파트 전경. [정부기록사진집]
1970년대와 80년대를 대표하는 강남의 아파트로 반포의 주공아파트 단지들과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반포주공아파트 단지들은 중산층에게 인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단지 중 하나였던 반포차관아파트의 경우, 1,490가구 모집에 수천 명이 청약해 경쟁률이 5.6대 1에 달했습니다. 지금 서울 아파트 청약에 비해서는 한참 낮은 경쟁률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산아제한정책의 일환으로 정관수술을 한 사람에게 청약우선권을 줬는데, 반포주공아파트 당첨을 위해 정관수술까지 불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반포주공아파트들은 한때 ‘내시촌’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77년 완공 이듬해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모습.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고층 아파트들이 1976년 지어진 구현대 1,2차 아파트이고, 우측에 건설중인 아파트는 현대 4차 아파트이다. 사진 전면의 주택과 전답에는 이후 현대 5~7차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의 경우 당시 흔하지 않았던 대형평형과 고급 설계로 분양 이전부터 ‘명품 아파트’로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아파트 준공 과정에서 한국도시개발(현대산업개발의 전신)은 1,512가구 중 952가구를 현대의 무주택 사원들에게 분양하고, 나머지 560가구를 일반에 분양한다는 조건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냅니다. 하지만 아파트 투기 광풍과 함께 압구정 현대아파트 분양권에 보통 아파트 한 채 값의 프리미엄이 붙게 되자, 한국도시개발은 슬그머니 분양 계획을 바꿉니다. 무주택 사원들에게 돌아간 것은 291가구였고, 나머지 661가구를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 현대그룹 관계자에게 몰래 빼돌려 분양합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은 1978년 수면 위로 올라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정작 제대로 처벌을 받은 이는 없었습니다. 아마 모두가 ‘공범’이었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