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철종과 복녀

shepherd2 2008. 10. 18. 18:26

▲ 호위청 현판. 강화도령 원범이를 철종으로 모셔오는데 동원된 호위 군사들의 총본부
ⓒ 이정근
'암 강화 숫 통진'

"강화 처녀는 통진으로 시집가서 살 수 있지만 통진 처녀는 강화에 시집와서 못 산다."

해안선 길이가 99k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강화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이다. 갑옷만 벗어놓아도 건널 수 있다는 섬 강화도는 김포반도 통진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지만 그만큼 배타적인 섬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충정왕과 창왕 그리고 우왕이 쫓겨 왔으며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과 능창대군이 유배당하여 이곳으로 왔고 영창대군도 이곳으로 쫓겨 와 불에 타죽었다. 만백성의 어버이라던 광해와 연산 임금도 군(君)이라는 칭호를 달고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1000년을 관통하며 왕도(王都)와 가까웠지만 왕권과는 멀고도 가까운 섬 강화도는 유배의 땅이었다.

▲ 강화대교(구교). 강화도는 연육교가 건설되어 육지화 되었다
ⓒ 이정근
지금이야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뭍으로 연결되어 섬이라 느끼지 못할 만큼 육지화되었지만 강화도는 여전히 섬이다. 19세기 말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전함 공격을 받았으며 우리나라를 식민화하려는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던 가슴 아픈 곳이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왕이 나왔으니 그가 조선 25대 국왕 철종이며 강화도령 원범이다.

1835년. 조선 24대 국왕 헌종이 후사(後嗣) 없이 갑자기 승하하자 왕실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후사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적자(嫡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왕실의 어른이자 종실의 제일 웃어른이신 대왕대비가 끈을 놓을 리 없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김조신의 딸로서 조선조 말 세도정치의 아성을 구축한 안동 김씨였다.

순조비 순원왕후를 축으로 하는 안동김씨와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익종)비 신정왕후를 축으로 하는 풍양조씨는 어느 쪽에서 먼저 왕을 내느냐 하는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영광과 몰락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신하라는 이름으로 조정의 권력을 틀어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는 때로는 협조하는 동반자로, 때로는 각을 세워 대립하는 라이벌로서 조정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종친부를 꺼내놓고 찾아보니 정조대왕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원범이 떠올랐다. 안동김씨의 좌장격인 김문근과 대왕대비는 지체 없이 원범을 택했다. 직계혈통에 마땅한 사람도 없었지만 정치적인 배경이 있거나 성군이 될 여지가 있는 똑똑한 사람보다도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있는 농사꾼 원범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적임자였다. 또한 풍양조씨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촌각을 지체해서는 아니 되었다.

대왕대비의 명(命)이 떨어졌다. 종묘사직을 이어갈 왕으로 원범이를 택한다는 교지였다. 이게 바로 택군이다. 택군(擇君). 조선 왕실사에서 이처럼 슬픈 일은 없었다. 임금이 신하를 임명하고 면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군왕을 선택하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비록 대왕대비의 명을 거치는 요식행위를 거쳤지만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것은 권위를 기반으로 군림해야 하는 왕실로서는 몰락으로 가는 막차를 타는 것이다.

▲ 용흥궁 현판.
ⓒ 이정근
안동김씨에 의해 간택(?)된 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대왕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로서 할아버지 은언군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하고 아버지 전계군은 이원경, 경응, 원범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형 이원경은 민진용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당했다. 이에 놀란 아버지 전계군이 두 아들을 데리고 한양을 빠져나와 강화도에 숨어들었다.

글을 읽고 깨우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원범의 아버지는 원범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하며 농사꾼 노릇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잃고 작은형마저 죽자 원범은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이렇게 외톨이가 된 원범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여인이 있었으니 복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영순이었다.

"동네사람들이 그러는데 영순이 너는 복녀래, 너를 데려가는 신랑감은 복 받는 복돌이가 된다구…. 나, 너한테 장가들고 싶은데 내 색시 되어 줄래?"

"……."

나뭇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원범이가 밭에서 콩밭 메던 영순이를 발견하고 지게를 받쳐놓고 잠시 쉬면서 더벅머리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영순이를 만나면 말해야지 라고 예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이지만 막상 영순이 앞에서 말을 꺼내려 하니 목소리는 잦아들고 떨렸다. 더듬거리며 말을 마친 열아홉 살 더벅머리 숫총각 원범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 이 땀 좀 봐."

원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영순이가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원범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콩당콩당 뛰는 처녀의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며 더벅머리 총각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영순은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뛰는 가슴과 원범에게서 전해져 오는 열기로 영순의 콧잔등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 용흥궁 내전
ⓒ 이정근
떠꺼머리총각 원범과 섬 처녀 영순의 사랑은 길지 못했다. 1850년 6월 5일. 영의정 정원용이 이끄는 제왕봉영 일행이 갑곶나루를 건너 강화도에 들이닥친 것이다. 깃발을 앞세우고 진해루(동문)를 통과하여 위엄 있게 들어오는 일행을 발견한 원범은 자기를 잡으러온 것으로 착각하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난감해진 것은 한양에서 강화까지 온 봉영 일행이었다. 하룻밤을 묵고 이틀 밤을 강화유수 관아에서 묵은 일행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더더욱 몸둘 바를 몰라 하는 것은 강화유수 정기세였다. 한양에서 봉영일행을 이끌고 강화까지 행차한 정원용은 관직으로는 하늘같이 떠받들어야 하는 만인지상 일인지하 영의정이었고 사적으로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내려온 일행이 불편하지 않게 보살피고 임금을 모셔가는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어야 출세 길도 열릴 텐데 원범이 산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영순이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강화유수는 영순이를 설득하고 영순이는 원범이를 타이르는 형국이 되었다. 원범이를 모셔갈 봉영일행이 강화도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영순이 역시 원범이를 잡아갈 무리라 생각하고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라며 깊은 산 속 동굴에 원범이를 밀어 넣었다.

원범이가 먹을 밥을 삼베 보자기에 싸들고 산을 오르던 영순이가 뒤돌아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강화유수 관아에서 갑곶 나루까지 줄지어 서 있는 일행이 예사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350여명이 더 되는 행렬과 기품 있는 가마가 준비된 것으로 보아 강화유수의 말처럼 원범이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유수의 말처럼 '원범이가 왕 노릇 하러 한양으로 가면 나는?'이라는 자문에 답이 없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마음씨 착한 원범이의 각시가 되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살겠다는 순진한 섬 처녀의 꿈은 유효한 것일까?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통한 답이 없었다.

▲ 용흥궁 내전
ⓒ 이정근

"원범아 널 잡으러 온 게 아니라 모시러 왔데."

"무에 할일이 없어 한양에서 예까지 농사꾼을 데리러 오냐? 날 죽이려고 잡으러 온게지…."

"아냐, 유수가 그러는데 널 왕으로 모시려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널 기다리고 있데."

"왕은 무신 얼어 죽을 왕? 감언이설로 날 꼬여서 배에 태우면 통진에 닿기도 전에 바다에 쳐 넣어 나를 죽일 텐데."

"아니래두, 며칠 전에 하얀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좋은 징조야, 내 느낌이 좋으니까 날 믿어봐."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가는 하얀 기러기를 원범이도 보았다. 그것을 영순이도 보았다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더더구나 영순이가 좋은 징조라고 믿어달라는데 믿음이 갔다.

"내가 한양으로 간다면 너는 어떡하냐?"

"뒤따라 갈 수 있으면 같이 가고, 따라오지 못하게 하면 니가 한양 가서 가마 보내면 되잖아, 왕은 사람도 죽이고 살린다는데 니가 왕이 되면 가마 하나 못 보낼려구."

"그래, 한양 가면 가마 보내 널 데려갈게."

영순이 손에 이끌리어 산에서 내려온 원범이는 강화유수 관아에 도착했다. 자신을 잡아다 죽일 수 있는 무리라는 의심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 원범은 기다리고 있는 영의정 정원용 앞에 넙죽 절하며 무릎을 꺾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또님 살려주세요.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영의정을 사또란다. 하기야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영의정을 본 일이 없는 원범이는 고을 사또가 제일 높은 사람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덕완군(德完君) 나으리."

호칭이 달라졌다. 아직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니까 나으리다. 언제부터 덕완군이었던가? 원범은 원범이고 농사꾼은 농사꾼이었는데 권력의 필요에 의해서 덕완군이라는 군호(君號)가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내려졌던 것이다. 당황한 영의정 정원용이 예를 갖추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하여 열아홉 살 더벅머리 총각 원범이는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되어갔다.

▲ 강화 역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행렬도. 갑곶나루와 동문이 보인다
이때부터 시위하는 군사들 창에 의하여 영순이는 원범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강화유수 관아에서 부랴부랴 봉영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렇게 하여 원범이는 꽃가마보다 더 지체 높은 가마를 타고 한양으로 떠났다. 옷고름 입에 물고 원범이가 떠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영순이는 흐르는 눈물을 삼베 적삼 저고리 섶으로 닦았다.

가마행렬이 갑곶 나루에 도착했다. 강화 고을 대장이라는 사또는 감히 타보지도 못할 호사스러운 배에 탄 원범이는 군중 속을 헤집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영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순이는 원범이를 보았다. 이것이 영순이가 원범이를 마지막 본 모습이다. 가마에 실려 한양으로 떠나는 원범이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이할 수 없었다.

통진에 도착한 봉영일행은 걸음을 재촉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국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용상 자리는 하루라도 비어 있어서는 안 된다. 임금 없는 나라는 주인 없는 나라와 같다. 원범이 산 속으로 숨어버려 사흘간을 허비한 영의정 일행은 순원왕후로부터 재촉을 받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새 임금 모셔오는 일이 지체되고 있으니 채근하는 파발마가 매일같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 갑곶에서 바라본 통진
ⓒ 이정근
문수산 자락에 야트막한 고개가 하나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강화도가 보이지 않는다. 가마 속에서 바다 건너 강화도를 바라보던 원범은 생각했다. '내가 살아서 강화도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팔자에 없는 가마타고 호사스럽게 가는 길이 아무래도 죽으러 가는 길만 같았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원범은 강화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13년 후 한양 땅 창덕궁에서 죽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고갯마루에 가마를 멈추게 한 원범은 가마에서 내려 강화도를 향하여 소리쳤다. "강화도야 잘 있거라 다시 보마 강화도야" 강화도라고 했지만 기실은 영순이일는지 모른다. 외롭게 살던 떠꺼머리총각 원범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줬던 여인이 영순이였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원범은 강화도를 다시보지 못했다. 이것이 원범이 마지막 본 강화도였다.

바다 건너 강화도를 바라보며 목울대에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울리는 목소리가 천둥이 치는 듯했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가마꾼들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지금도 강화도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그때 강화도령의 목소리가 바다 건너 강화도까지 들리는 듯 했다고 한다. 아마도 하늘을 나는 갈매기가 원범이의 마음을 강화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줬을 것이다. 이때부터 강화도와 통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천둥고개라 불렀고 지금도 천둥고개라 불린다.

▲ 철종임금 즉위식이 거행된 창덕궁 인정전
ⓒ 이정근
1849년 6월 9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조선 제 25대 국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어제 강화에서 도착한 즉시 창덕궁 희정당에서 거행된 덕완군 봉영식 후 거행되는 공식행사였다. 이로서 비어 있던 용상 자리가 채워졌고 조선 25대 국왕 철종이 탄생한 것이다. 이래서 왕은 태어날 수도 있고 만들어질 수도 있나보다.

이렇게 하여 떠꺼머리 농사꾼을 왕으로 밀어올린 안동김씨는 좌장격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여 국혼을 치름으로서 김국근은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천하는 안동김씨 세상이 되었다. 원범이 철종으로 등극 후 자신을 왕으로 점지한 순원왕후가 사망한 것을 기회로 친히 정사를 챙기려 했으나 안동김씨의 견제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안동 김씨의 전횡으로 국법질서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인내의 한계점에 다다른 백성들이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또한 부활을 약속하는 그리스도 사상과 래세(來世)를 예견하는 미륵신앙이 백성들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동학이다.

▲ 갑곶나루에 있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탱자나무는 원범이 지나가는 것을 봤을것이다.
ⓒ 이정근
자의반 타의반이었을까? 타의에 의해서일까? 국정의 중심에 있어야 할 철종은 국정의 변방을 헤매다 주색(酒色)에 빠져들었다. 철종은 김문근의 딸 철인왕후 외에도 7명의 후궁을 두어 여러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숙의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 한 명만 성장하여 혼례를 올렸다. 그 남편이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다.

아직 젊은 나이 서른셋. 제위 14년만에 철종이 죽자 또 한 번 조정이 뒤집혔다.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한참 탄탄해지는 세도정치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안동김씨는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 반면 이번에는 풍양조씨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철종을 옹립하는데 실패한 풍양조씨는 이번에는 안동김씨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원군 이하응과 함께 치밀한 계획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왕실의 종친으로서 안동김씨의 바짓가랑이를 기어야 하는 수모와 모멸을 당하며 칼을 갈고 있던 대원군 이하응의 계책과 밀약에 따라 수순대로 진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조대비와 대원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안동김씨에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새 임금이 결정되었으니 그가 대원군의 아들 명복이며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다.

▲ 용흥궁에 있는 철종잠저구기비
ⓒ 이정근
육지의 끄트머리 김포 반도 통진에서 694m 강화대교를 건너가면 강화도가 제일 처음 반기는 땅 갑곶이다. 강화읍에서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언덕길 오른쪽에 원범이 살았던 집 용흥궁이 있다. 떠꺼머리 농삿꾼에서 왕이 된 원범이 살았던 철종의 잠저(潛邸)다. 원범이 왕으로 등극한 철종 4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쓰러져가는 초가 3칸을 헐어내고 내전1동, 외전1동, 별전 1동을 지어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경내에는 강화도령 원범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철종잠저구기비가 들어 있는 비각이 있다. 정치적인 배경이 없고 직계 친인척이 없는 철종이어서인지 후대에 들어선 고종의 잠저 운현궁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다도예절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문 앞에는 봉영의식을 주도한 상국 영의정 정원용의 비와 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원범이를 한양으로 떠나보낸 영순이는 매일같이 해질녘이면 갑곶나루터에 나가 원범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원범이는 돌아오지 않고 무심한 갈매기만 끼륵끼륵 울어댈 때 영순이도 같이 울었다. 영순이는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은 원범이를 생각하며 시집도 안 가고 살다가 이름 없는 들꽃처럼 스러져 갔다고 전해져 온다.


< 출처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5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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