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

팔순 소년과 가을 데이트

shepherd2 2008. 11. 5. 16:40

팔순 소년과 가을 데이트 [쉼터 ]  choidk765
 eskang - 산호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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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소년과 가을 데이트
 




--팔순 소년과 가을 데이트 --




아버지를 모시고 오랜만에 포도밭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

저보다 더 건강하신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라 잡으려고 후후 

숨이 차니 참 다행입니다 .든든한 아버지의 팔짱을  두르고,

손깍지도 포근히 꼬옥 끼었습니다 .



두 사람이 초등학생 단짝처럼  오른발 ,왼발 나란나란 맞추고 ,

단풍 든 산길을 걸어가 햇살 부드러운 나뭇가지 아래서
마주보며
환하게 웃음도 터트립니다 .
아주 행복한 가을 데이트였습니다 .






소란한 한우갈비보다는 품격 높은 중국집 고급 요리를
즐기시는
아버지는 항상 정해진 단골메뉴  전가복 ,팔보채를
주문하십니다  .


요리가 우아하게 투명한 소스를 입고  나오자 ,저에게도
작은 종지에  술 한잔을 따라 주시고, 해삼 ,송이버섯 ,죽순 ,
전복을 골라 접시에 듬뿍 담아 주셨습니다 . 그리고는 모처럼
제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십니다 .


“ 어디 아픈데는 없니 ? 건강하려면 잘 먹어야한다 .

 어서 많이 먹어라 ! 중국요리는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다 .

 아이들은 잘있니 ? ”   


늘 같은 말씀 ,같은 질문이지만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아버지 !

큰 가슴으로 포용하는 부정의 따스함에 괜스레 눈물이 나서
자꾸만 울먹울먹입니다 .


“양파가 몸에 좋단다 매일 반쪽씩 억지로라도 먹어라 .

식초와 약간의 흑설탕 ,간장에 담가두면 저절로 맛이 든단다 
마늘장아찌도 철마다  담가 두고두고 먹으면 혈압에 좋단다 . ”





자상한 아버지는 기억력의 천재라 시시콜콜 이제는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지나간 풍경들을 세세히 그려내십니다 . 수채화로 담담하게
엮어내시는 흘러간 세월을 속죄하시고 ,
용서도 구하셨습니다 .


“아버지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 용서는 무슨 ...
제가 감사드려요 .
남보다 꿋꿋하게 당당하게 자부심 넘치게
잘 길러 주셨잖아요 ”


못난 딸에게 고개 숙인  팔순의 아버지는 뜬금없이
말씀하십니다   .
“돈 많이 못 벌어 호강도 못 시켜 주었다” 고 자책하시더니 ....

" 시대가 나를 할퀴고 ,온통 나를 괴롭힌 사건들이 많았다 "
"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만 주는 역사였단다 "

 신지식인으로 살아남기의 어려움 ! 고난의  역사책 !
 나의
아버지 .격동의 세월은 그렇게 다 흘러갔으리 !


추운 겨울 날 , 낡은 외투를 창피하다고 벗어놓고 타박타박 
학교에 가는 철없는  저를 배웅하던
젊은 아버지 .

마포강 ,밤섬으로 배를 타고 여름수영을 갔던 보름달밤을
세세히
신윤복의 그림처럼 그려내셨습니다 .


평생 영어책을 놓지 않고 살아오신 분 !
근검절약의 표상이신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저는 , 놀라운 아버지의 추억담 ,
씁쓸하고도 달큰한  기억속에서 다정다감의 극치를
만끽합니다 .






어느 새 까마득한 먼 옛날  10월의 아침 .
교육자이신 아버지는
신혼의 단꿈속에서 저를 안고
둥개둥개 까꿍을 하십니다 .

도리도리 짝짝꿍을 가르치고 잼잼 시범을 보였습니다 .

햇쌀 ,파란 돈 ,흰 실 ,연필을 차려놓은 돌상에서
제가 뭘 잡았는지
다 기억합니다  .
그날의 제 작은 얼굴에서 피어나던 미소가

지금도 똑같다고 감탄하셨습니다  .


담백한 요리가담긴 초간장 접시속으로 황당하게도
눈물이 퐁당
빠집니다 .
‘유니크한 스토리텔러 ’ 나의 아버지 !


때로는 엄격하시고 ,때로는 몽상적이시고 ,
때때로 오만하시고 ,
너무 자주 까칠하셔서
외경스럽기만했던 나의 아버지 !



그  무섭던 아버지가 작은 소년이 되어 영시, 불어 ,중국어를

식탁위에서 줄줄 읊으시며 바깥세상을 떠돌다 온 고명딸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


낮술의 향기가 같은 DNA를 찰랑찰랑 적시고 ,
같은 코드를 가진
감성의 뇌를 타고 흘러 넘쳐
‘이것이 세라비 ! 세라비 ! ’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






공자님 말씀도 아버지가 하시면 유머 !

“아는 자보다 즐기는 자가 더 행복하다 .

 딸과 함께한  낮술과 요리가 날 기쁘게 하는구나 ”


아버지가 즐거워하시니 그저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딸은 소녀가 되었습니다 .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런 날이 오겠습니까 ?

더욱 더 자주 찾아 뵙고 팔순 소년의 기쁜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렵니다 .
살아있음에 감사드립니다 .
가족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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