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일본의 학습 지도요령에 독도 문제를 기술한 것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일본의 대외 영토 분쟁중 가장 큰 것은 러시아와의 북방영토문제이다.
학습 지도요령에 기술된 내용도 “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독도 문제 등 일본의 영토에 대해 이해를 심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어디까지나 독도문제는 북방영토 반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각국과의 영토 분쟁 중의 한가지로 되어 있다.
정작 일본과 러시아간의 북방영토문제는 한국어로 자세히 설명된 곳이 없는 것 같아서 한번 북방영토 문제도 정리해 보았다. 일본과 한국간의 독도문제에 관해서도 국제법상의 해석 문제와 역사적 경위, 일본의 태도 등 참고가 되는 내용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선 북방영토(북방 4도라고 부를 때도 있다)가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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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말하는 북방영토를 에토로후(択捉), 구나시리(国後), 시코탄(色丹), 하보마이(歯舞)의 4개 섬으로 이루어지므로 북방 4도라고 부르지만 하보마이는 정확히 말하면 한개의 섬이 아니라 작은 섬이 여러개 있는 하보마이 제도를 말한다. 북방영토 중에 가장 큰 섬인 에토로후 섬은 면적이 3185 평방 킬로미터로 제주도 (1845 평방 킬로미터)보다도 2배 가까이 큰 섬이다. 두번째로 큰 섬인 구나시리는 1497평방 킬로미터로 제주도보다 약간 작으며 시코탄은 255평방 킬로미터로 울릉도 (72 평방 킬로미터)의 3배 정도 된다. 하보마이 제도는 여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시보츠 섬은 면적이 45평방 킬로미터로 울릉도의 절반을 넘는 정도 크기이다.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는 북방영토의 총 면적은 5036 평방 킬로미터로 일본의 치바현과 거의 같은 크기이며 경기도의 절반 정도 크기이다.
북방영토는 홋카이도로부터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까지 이어지는 쿠릴 열도에 속하는 섬이다. 물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어디까지가 쿠릴 열도에 속하는지에 관해 의견 차이가 있으며 쿠릴 열도는 일본에서는 치시마 (千島) 열도 라고 부른다. 쿠릴 열도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할 것을 명기했으나 북방 영토는 쿠릴 열도중에서 홋카이도에 가장 가까운 섬들로서 쿠릴 열도의 정의가 어디까지인지가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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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원래 이 지역은 선주민인 아이누 민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일본 동북 지방과 홋카이도는 원래 아이누 족이 거주하던 땅으로 일본은 원래한반도를 비롯하여 대륙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 서쪽에 나라를 세우고 동북쪽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넓혀 왔다. 일본의 천황이 권력을 잃고 무사들이 정권을 잡고 막부를 세웠을 때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쇼군” 즉 장군이라고 불리웠다. “장군”의 유래는 “정이대장군”인데 이는 “오랑캐를 정벌하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만주의 유목민족을 오랑캐로 칭했으나 일본에서는 아이누 민족을 오랑캐로 취급한 셈이다. 지금은 도쿄가 일본의 수도이지만 오사카, 교토를 비롯한 서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일본의 중심은 오사카, 교토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옛날에 현재 도쿄 지역을 비롯한 동일본 지역의 무사들이 성격이 거칠었다는 것을 비꼬아서 “아즈마 에비스” 즉 동쪽 오랑캐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즈마 에비스는 한자로 쓰면 東夷인데 예전에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가리켜서 동이족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일본 동북 지역에는 아이누 언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홋카이도는 특히 많아서 삿포로, 왓카나이, 오타루, 토마코마이 같은 주요 도시들 이름도 다른 지역과는 매우 다른데 모두 아이누 언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미국 중서부의 지명들이 인디언 언어에서 유래한 것과 흡사하다.
아무튼 도쿄 북쪽 지역은 일본 역사에 등장한 역사가 비교적 짧다. 전국시대는 일본 혼슈 최북단인 현재의 아오모리현 일대를 지배한 마츠마에 번이 홋카이도 지역에 대한 개발, 그리고 아이누 사람들과의 무역 권한을 가졌다. 미국이 아메리칸 인디언을 정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츠마에 번은 홋카이도 지역에 거주하던 아이누 민족을 정벌해서 북쪽으로 쫓아내고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에 걸쳐서 홋카이도 전 지역을 개발하고 지배하에 넣었다. 홋카이도의 동쪽 끝 바다 건너에 있는 현재의 북방영토는 1600년대에는 어렴풋이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정확히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의 섬을 파악하게 된 것은 1786년에 모가미 토쿠나이 (最上徳内) 라는 사람이 막부의 명령을 받아 홋카이도 동부, 사할린, 그리고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의 지역을 조사한 이후이다. 당시 이미 러시아도 이 지역에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에도 막부 측은 러시아의 진출을 경계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이미 이때 러시아 사람들 일부는 현재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북방 영토의 가장 큰 섬인 에토로후에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진출이 점점 늘어나고 1855년에는 일본과 러시아간에 영토 범위를 협의하여 러일 통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때 정한 경계선이 에토로후 섬과 우룹푸 섬의 사이에 있으므로 현재까지 일본이 에토로후 섬까지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1855년의 이 조약이 체결될 때 사할린 섬은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할린 섬에는 일본과 러시아 양쪽 모두 진출하여 일본인과 러시아인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1875년에 러시아와 일본은 상트페테부르쿠 조약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교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내용은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가 지배하는 대신에 쿠릴 열도 전체를 일본측에 할양하는 것이다. 일본 측으로는 사할린의 영유권을 얻는 것 보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던 홋카이도의 개발이 먼저였고 사할린을 잃는 대신에 쿠릴열도의 18개 섬들을 일본 땅으로 만들 수 있었으므로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1875년부터 사할린 섬 전체가 러시아 땅이 되었으나 1905년의 러일 전쟁때 사할린 전체를 일본이 점령했다. 러일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나고 미국이 중재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추가로 북위 50도선 남쪽의 사할린 섬 절반을 러시아로 부터 할양 받게 되었다. 1905년부터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할 때 까지 사할린 섬 남부와 캄차카 반도 바로 앞의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현재의 일본 영토를 정한 것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조건으로 서명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일본이 쿠릴 열도와 사할린 남부에 대한 지배를 포기할 것이 명기되어 있고 일본이 서명했으므로 북방영토가 쿠릴 열도의 일부라고 해석할 경우 문제는 끝난 것이지만 쿠릴 열도가 어디까지를 말하느냐에 관한 논란이 일었고 독도문제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 땅을 넓혀주려고 개입한 것이 원인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토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