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고복수, 타향과 민족의 한
고복수가 노래를 부른것은 1928년부터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것은 1933년 타향이 레코드로
제작되어 (1934년에레코드로 제작되었다는 얘기도 있음)
불티나듯 팔리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장안에 퍼졌습니다. 그때 부른 타향은 뒷날
노래이름이 타향살이로 바뀌고 노래를 잘 부르던
못 부르던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타향살이가 흥얼거려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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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의 특유한 목소리와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이노래는, 그 당시 듣는 이로 하여금 민족의 비분을 공감케해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또는 부르면서 모두가 부등켜 안고 울음을 터뜨리던
노래였습니다. 고복수가 간도 용정에서 공연하면서 이노래를 불렀을 때
한 여인이 비탄에 못이겨 자살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노래는
나라없던 국민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작곡 손목인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서도
이 시기는 대중가요 전성기이기도 했습니다.
채규엽은 1930년부터 노래를 불러 직업가수 1호라고도
했고 왕수복, 이난영, 선우일선과 비슷한 시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남자가수가 고복수였습니다.
그 시대에 대표적인 남자가수
채규엽과 강홍식(최민수 외할아버지)이 있었지만
6.25후에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었어도 고복수의
노래는 끊임없이 불려 졌습니다. 1957년 고별연을 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멈췄다고 했어도 사람들의 입에선서는 그 노래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2년 2월 10일 6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노래들은
남아있습니다. 남인수는 조금 뒤에 나온 가수입니다.
타향살이 몇 해런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왼쪽사진은 1957년 고복수님 은퇴 공연장에서의
기념사진입니다.오른쪽 세번째 분이 고복수, 앞줄왼쪽부터
차례로, 남인수,신카나리아, 황금심, 오른쪽 사진은 타향이
최초로 발표되던시절의 오케이 레코드의 표지입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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