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 되돌아 볼까

부부 수업료

shepherd2 2011. 5. 28. 15:58

         

 

부부 수업료



 

 

 

▲ 권성희 변호사

몇 년 전 한 부인이 어색한 색안경을 낀 채 이혼하겠다고 변호사인 나를 찾아왔다. 남편에게 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더 이상 못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변호사님, 저 (남편과) 살아야 해요? 말아야 해요?"라고 물었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과 아이들에게 끼칠 충격, 이혼녀로 낙인 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혹시 남편의 폭행 습관이 고쳐진다면 남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겠습니까?"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어요. 변호사비가 '남편 수업료'가 되길 빌어보세요." 사실 이혼소송을 하게 되면 사건심리 판사와 조정판사, 조정위원, 가사조사관 등 여러 사람이 개입된다. 이런 과정에서 폭행의 해악을 여러 번 지적받게 될 것이니 남편에게 나쁜 버릇을 고칠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가 거짓말을 한다며 딴소리를 했다. 자기가 배신당한 것이라며 더 흥분했다. 남편은 오히려 아내가 가정의 중요성을 모른다며 고개를 돌렸다. 이혼 외에 다른 길은 전혀 없는 듯했으나, 아내는 억울해하면서도 이혼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떨쳐 내지 못하는 게 역력했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이혼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됐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경우 차라리 이혼은 미루는 것이 낫다. 준비가 안 된 이혼을 하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후폭풍을 맞는다. 극복에는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나는 부인에게 피해의식만 가지지 말고 이 기회에 인생 전체를 성찰하고 남편이 하는 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는 한편, "처(妻)가 이혼을 원치 않으니 남편의 폭행습관을 고쳐줄 기회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남편 몰래 법원조정위원회에 냈다. 조정위원들은 남편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마다치 않았지만 남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조정 결렬로 사건은 재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부인은 처음 몇 달 동안 집에서 사사건건 트집 잡던 남편이 집에 없으니 살 것 같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아빠는 못 고친다"며 이혼에 강하게 동의했었는데, 차츰 생각이 바뀌는 것 같았다.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혼소송 중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까 봐 신경도 쓰였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친권 및 양육권,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놓고 치열하게 공방을 거듭했다. 그렇게 또다시 1년여가 지난 후 판결선고를 목전에 두게 됐다. 이제 이혼은 진짜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되었다. 나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하루는 부인이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남편을 바꿔줬다. 남편은 "물어볼게 있는데요. 진짜로 이 사람이 처음부터 제 버릇 고친다고 소송한 거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네"라고 답했다. 그러자 남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부인은 며칠 후 남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부인이 내게 한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여태껏 변호사비가 '남편 수업료'라고 생각해왔어요. 이제 보니 그게 저 자신의 수업료였어요."

남편이니까 생활비 등은 당연히 줘야 한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의 말 중에도 맞는 말이 있었지만 그땐 도저히 그렇게 들리질 않았다고 했다. 아이들도 커 갈수록 아빠라는 존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지금 이 부부는 전혀 딴 사람들이 됐다. 이들 부부의 행복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부인은 불화의 나락에서 방법을 모르고 허덕이는 부부에게 새로운 부부 화합의 연금술이 있을 수도 있다고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이 일은 내 자신의 결혼생활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포기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위기는 기회란 말은 이혼에서도 통한다. 자존심을 접어놓고 절실하게 행동하면 상대방에게도 통하게 마련이다. 성장 과정과 가치관이 다른 두 성인이 장밋빛 환상만으로 만나는 것이 결혼 생활의 한계이자 실체다.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깨달음이 화해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혼한 사람의 80%가 후회한다고 한다. 재혼 후 다시 갈등을 겪고 어렵게 재혼 유지에 성공한 사람들은 "내가 첫 결혼에서도 이것을 알았어야 했는데…"라고 탄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혼 역시 삶의 한 방법이요, 때론 훌륭한 선택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이혼 후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예도 볼 수 있다. 다만 이혼소송을 수행하는 변호사로서 이혼을 해야 할 경우 준비된 이혼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이혼 이후의 삶에 대한 참된 준비 자세가 재산분할로 한푼 더 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혼인 유지건 이혼이건 궁극적으로 개인이 성숙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 숨어있기 좋은 방 님의 까페에서 옴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