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전·현직 퍼스트레이디는 어떻게 활동했나?
뉴시스 | 강경지 | 입력 2011.06.07 06:01 | 수정 2011.06.07 10:25 |
【서울=뉴시스】강경지 기자 = 퍼스트레이디는 대통령 못지 않게 국정 전반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친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대통령이지만 그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은 퍼스트레이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 부인의 가치관과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따라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의 성공여부가 좌우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전·현직 퍼스트레이디들은 최고 통치자의 반려자로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 및 정치적 상황에 따라 너무 튀어도, 또 너무 가라 앉아도 안된다.
조은희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쓴 '한국의 퍼스트레이디'에 따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1948~1960 재임)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난후 타이핑과 통·번역을 도맡았던 실질적인 비서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 취임 후 미군정으로부터 관련 업무를 이양받는 과정에서 문서 타이핑을 도왔으며 남편의 영문구술을 듣고 외교 문서를 타자로 쳐서 정리했다.
손님이 경무대(1960년대 청와대로 명칭이 바뀌었다)에 올 때는 부부 동반으로 오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당시 한국 남자들은 모임에 기생이나 첩을 동행하는 풍습을 갖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를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윤보선 전 대통령(1960~1962 재임)의 부인 공덕귀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청와대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이는 청와대에서 고부가 함께 살았던 최초 사례였다고 한다. 한국의 첫 여성 신학자이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정치적 시대적 상황이 그녀의 역동적인 역할을 허락하지 않아 조용한 퍼스트레이디로 지냈다. 외빈 접견 등 꼭 참석해야하는 자리에만 얼굴을 내비쳤다.
공 여사는 정치에는 일제 참견하지 않았고 흔히 하는 봉사 활동도 자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정치 풍토는 부인이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1963~1979 재임)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남성의 외도에 대해 유난히 엄격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다른 여자들 때문에 평생 눈물 흘리고 살던 어머니를 보고 자랐던 육 여사의 어린 시절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 여사는 바람피우는 공직자들은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남편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또 박 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도 불같이 화를 내면서 상당히 모진 소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육 역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임무는 '청와대의 귀'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보와 민심을 차단하는 일은 곧 대통령의 정치적 장래를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손수 민원을 챙겼다고 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1979~1980 재임)의 부인 홍기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로서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도 그녀는 말없이 남편의 건강을 챙기는데 만 힘썼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1980~1988 재임)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퍼스트레이디로서 펼친 내조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80년 당시 우리나라 정치문화는 폐쇄적이고 남성중심적이었다. 정치 영역에서 여성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사는 남편인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때부터 처음으로 부부가 나란히 취임식장에 입장했다. 이런 문화에 익숙치 않은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과 나란히 손을 흔들고 나타나는 이 여사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이 여사는 특히 의상과 관련해 재임기간 내내 많은 소문과 비난에 시달렸고 이는 이 여사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
노태우 대통령(1988~1993 재임)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앞에 잘 나서지 않는 퍼스트레이디였다. 선거유세 때도 언론이나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남편의 득표활동을 도왔다고 한다. 대선기간 중 전국을 수차례 순회하고 10만명 이상의 유권자를 만났지만 선거기간 중 단 한번도 공식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김 여사의 이러한 행보는 차기 대통령 부인은 다소곳한 '현모양처'형 이미지여야 한다는 선거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임 퍼스트레이디인 이순자 여사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반면교사로 삼아 대통령 부인 감추기 작전을 편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1993~1998 재임)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환경보호와 건전한 소비문화에 앞장섰다.
청와대 식당메뉴를 칼국수, 설렁탕, 갈비탕, 비빔밥 등으로 간소화했다. 식당 운영을 셀프 방식으로 바꾸고 식당에 '음식은 남기지 맙시다'는 표어를 붙였다고 한다. 또 일회용품 안쓰기, 폐품 줄이기, 재생지 쓰기 등의 활동도 벌였다. 청와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청와대 방문 기념품을 없애고 생화를 조화로 바꾸고 선물 안주고 안받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안방로비도 원천 봉쇄했다. 남편 재임기간 중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 부인들을 자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들인 대통령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부인들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는 의례적인 모임조차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성품으로 손 여사를 통한 안방로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1998~2003 재임)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권력을 거부한 독립적인 퍼스트레이디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로 행할 수 있는 권력을 스스로 거부하며 늘 "나는 내조자에 불과해요", "나는 힘이 없어요"라고 스스로를 낮추곤 했다고 한다.
여성과 장애인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평생 일해 온 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이와 관련된 활동에 적극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발족한 결식아동을 돕는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의 명예회장을 맡았다.
퍼스트레이디의 단독 해외 순방 영역을 개척한 점도 두드러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는 청와대 5년 동안 총 다섯 차례 단독 해외방문을 했다.
특히 2002년 5월에는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 최초로 남편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 의장국으로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워싱턴 DC에서 의회조찬기도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2003~2008 재임)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취임 직후 '조용한 청와대' 만들기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권 여사는 대통령 임기 후반기부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명예위원장을 맡는 등 대외 활동의 보폭을 넓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내조활동은 적극적인 편이다. 김 여사는 지난해 11월 초 폐막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도 내조 외교에 주력했다.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는 김 여사는 이 정상회의 기간동안 오·만찬 메뉴를 직접 고르는 등 적극적인 내조 외교를 펼쳤다.
김 여사는 2009년 6월에는 홍콩의 유력지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아시아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 '녹색성장'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했다. 녹색성장은 이 대통령이 내세운 국정운영 핵심 기조이다.
bright@newsis.com
대통령 부인의 가치관과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따라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의 성공여부가 좌우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전·현직 퍼스트레이디들은 최고 통치자의 반려자로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 및 정치적 상황에 따라 너무 튀어도, 또 너무 가라 앉아도 안된다.
조은희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쓴 '한국의 퍼스트레이디'에 따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1948~1960 재임)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난후 타이핑과 통·번역을 도맡았던 실질적인 비서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 취임 후 미군정으로부터 관련 업무를 이양받는 과정에서 문서 타이핑을 도왔으며 남편의 영문구술을 듣고 외교 문서를 타자로 쳐서 정리했다.
손님이 경무대(1960년대 청와대로 명칭이 바뀌었다)에 올 때는 부부 동반으로 오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당시 한국 남자들은 모임에 기생이나 첩을 동행하는 풍습을 갖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를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윤보선 전 대통령(1960~1962 재임)의 부인 공덕귀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청와대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이는 청와대에서 고부가 함께 살았던 최초 사례였다고 한다. 한국의 첫 여성 신학자이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정치적 시대적 상황이 그녀의 역동적인 역할을 허락하지 않아 조용한 퍼스트레이디로 지냈다. 외빈 접견 등 꼭 참석해야하는 자리에만 얼굴을 내비쳤다.
공 여사는 정치에는 일제 참견하지 않았고 흔히 하는 봉사 활동도 자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정치 풍토는 부인이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1963~1979 재임)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남성의 외도에 대해 유난히 엄격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다른 여자들 때문에 평생 눈물 흘리고 살던 어머니를 보고 자랐던 육 여사의 어린 시절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 여사는 바람피우는 공직자들은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남편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또 박 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도 불같이 화를 내면서 상당히 모진 소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육 역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임무는 '청와대의 귀'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보와 민심을 차단하는 일은 곧 대통령의 정치적 장래를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손수 민원을 챙겼다고 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1979~1980 재임)의 부인 홍기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로서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도 그녀는 말없이 남편의 건강을 챙기는데 만 힘썼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1980~1988 재임)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퍼스트레이디로서 펼친 내조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80년 당시 우리나라 정치문화는 폐쇄적이고 남성중심적이었다. 정치 영역에서 여성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사는 남편인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때부터 처음으로 부부가 나란히 취임식장에 입장했다. 이런 문화에 익숙치 않은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과 나란히 손을 흔들고 나타나는 이 여사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이 여사는 특히 의상과 관련해 재임기간 내내 많은 소문과 비난에 시달렸고 이는 이 여사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
노태우 대통령(1988~1993 재임)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앞에 잘 나서지 않는 퍼스트레이디였다. 선거유세 때도 언론이나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남편의 득표활동을 도왔다고 한다. 대선기간 중 전국을 수차례 순회하고 10만명 이상의 유권자를 만났지만 선거기간 중 단 한번도 공식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김 여사의 이러한 행보는 차기 대통령 부인은 다소곳한 '현모양처'형 이미지여야 한다는 선거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임 퍼스트레이디인 이순자 여사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반면교사로 삼아 대통령 부인 감추기 작전을 편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1993~1998 재임)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환경보호와 건전한 소비문화에 앞장섰다.
청와대 식당메뉴를 칼국수, 설렁탕, 갈비탕, 비빔밥 등으로 간소화했다. 식당 운영을 셀프 방식으로 바꾸고 식당에 '음식은 남기지 맙시다'는 표어를 붙였다고 한다. 또 일회용품 안쓰기, 폐품 줄이기, 재생지 쓰기 등의 활동도 벌였다. 청와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청와대 방문 기념품을 없애고 생화를 조화로 바꾸고 선물 안주고 안받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안방로비도 원천 봉쇄했다. 남편 재임기간 중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 부인들을 자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들인 대통령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부인들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는 의례적인 모임조차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성품으로 손 여사를 통한 안방로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1998~2003 재임)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권력을 거부한 독립적인 퍼스트레이디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로 행할 수 있는 권력을 스스로 거부하며 늘 "나는 내조자에 불과해요", "나는 힘이 없어요"라고 스스로를 낮추곤 했다고 한다.
여성과 장애인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평생 일해 온 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이와 관련된 활동에 적극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발족한 결식아동을 돕는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의 명예회장을 맡았다.
퍼스트레이디의 단독 해외 순방 영역을 개척한 점도 두드러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는 청와대 5년 동안 총 다섯 차례 단독 해외방문을 했다.
특히 2002년 5월에는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 최초로 남편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 의장국으로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워싱턴 DC에서 의회조찬기도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2003~2008 재임)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취임 직후 '조용한 청와대' 만들기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권 여사는 대통령 임기 후반기부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명예위원장을 맡는 등 대외 활동의 보폭을 넓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내조활동은 적극적인 편이다. 김 여사는 지난해 11월 초 폐막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도 내조 외교에 주력했다.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는 김 여사는 이 정상회의 기간동안 오·만찬 메뉴를 직접 고르는 등 적극적인 내조 외교를 펼쳤다.
김 여사는 2009년 6월에는 홍콩의 유력지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아시아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 '녹색성장'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했다. 녹색성장은 이 대통령이 내세운 국정운영 핵심 기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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