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개가 넘는 제주의 오름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풍경을 갖고 있다. 오름이라면 대부분 봉긋한 능선을 떠올리지만, 물영아리오름은 장대하게 뻗은 삼나무들로 가득한 ‘수직의 세상’이다. |
▲ 오름 능선의 한쪽 사면에 보라색 한라꽃향유가 환하게 피어난 아부오름의 분화구 안쪽에는 삼나무가 둥근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다. |
▲ 송당목장 안에 있는 민오름의 정상에서 방목 중인 소들을 만났다. 평화롭게 풀을 뜯던 소들은 무엇이 궁금한지 한동안 이쪽을 바라보았다. | | |
10여년 전만 해도 제주를 여행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제주공항에서 내려 렌터카나 택시를 빌려 타고 섬의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이 유일한 제주여행법이었습니다.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외돌개, 용두암, 섭지코지…. 볼 것들은 다 해안도로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보통사람들에게 제주도에 가는 경험은 평생 한두 번 있는 것이었습니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고자 했고, 그러자니 해안도로를 따라 명승지를 바쁘게 도는 것이 제주여행의 모범 코스가 됐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즈음에는 제주를 그렇게 바쁘게 여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아마도 하루이틀만에 제주를 다 보려는 ‘욕심’을 버리게 됐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어차피 제주는 한두 번의 관광만으로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는 곳이란 걸 알아차린 것이지요.
욕심을 버린 여행자들은 천편일률적인 관광지의 동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비로소 제주의 풍성한 진면목을 하나둘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주에 무려 300여개가 넘는다는 부드러운 능선을 가진 ‘오름’도 그 중의 하나이지요.
깊어가는 가을에 제주로 가서 ‘바다를 보지 않고 돌아오는 여행’을 해봤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 바다의 아름다움은 여전하지만, 바다 말고도 장쾌하게 도열한 삼나무숲과 유려한 능선의 오름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적입니다. 1박2일의 짧은 일정 내내 제주의 오름과 숲을 찾아다녔습니다. 쪽빛 바다와 기암 해변을 빼놓더라도 제주에서 가야 할 곳은 무궁무진했고, 시간은 아쉬웠습니다.
특히 가을날 억새 무성한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오름을 걷는 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더군요. 누군가 그랬다지요, 걷는다는 것은 ‘온몸으로 하는 기도’라고요. 그 말대로라면 제주의 오름 산책이야말로 ‘가장 빼어난 곳에서 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을 억새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따라비오름을 시작으로, 분화구에 원형으로 삼나무를 심어놓은 아부오름, 광활한 목장의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는 민오름, 빽빽하게 솟은 수직의 숲 사이로 오르는 물영아리오름을 거쳐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까지 바쁘게 돌아봤습니다. 오름들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눈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민오름을 오르는 길에 통과하는 송당목장의 숲길은 감히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라고 이름 붙여줄 만했습니다. 또 들머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매다 겨우 오른 따라비오름은 화려한 은빛 억새의 물결이 장관이었습니다. 아부오름의 분화구를 둘러싸고 피어난 진보랏빛의 한라꽃향유는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왜 그랬을까요. 오름을 오르는 길에서 줄곧 깊고 낮은 첼로의 음률이 귓속에서 맴돌았습니다. 바람에 출렁거리는 억새가, 부드러운 능선이, 드넓은 초지의 목장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첼로의 선율과 닮아 있었습니다. 아, 이제 제주에도 첼로의 음률이 어울리는 깊은 가을이 찾아왔나 봅니다.
제주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8-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