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토요일 태풍이 온다더니 흐리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 오후
‘문화우리’ 에서 주최하는 서울 성곽답사 중 제3구간 흥인문(동대문)-
숭례문 구간을 다녀왔다.
사진: 서울성곽답사 약도-문화우리.(문화우리 홈페이지: http://www.culturec.org )
필자가 토요일 간 곳은 이중 흥인문-숭례문 구간이다. 이날 안내 강의는
황평우(黃平雨) 문화연대 문화유산 위원장이 해 주었다.
사진: 9월 15일 걸은 구간
흥인문(興仁門)
답사는 흥인문부터 시작하였다. 동대문 시장에서 모여 동대문 옹성 안으로
들어 가는 데 건너는 길이 없어 차들이 신호대기 할 때 눈치껏 해야 한다.
위험부담은 물론 각자 스스로 져야 하고.
사진 : 흥인문 일출, Elizabeth Keith, 1920
날씨가 흐린데다가 일행에 뒤쳐질 수가 없어 전경이 나오는 앵글을 찾을 새도 없이
급히 찍었더니 사진이 시원찮아 대신 위 그림을 올렸다.
옹성(甕城) 안에서 고대(高大)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문화관련 시민운동을
하는 강사의 설명이 시작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인(仁)이 동쪽이라
문 이름 가운데 자에 인이 들어갔다는 것, 멀쩡한 문 이름을 일제(日帝)가
바꾼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구어(口語)에서는 동대문이라 했다는 등이다.
(이상은 필자도 다른 글에서 이야기 한 바 있다)
도성(都城) 파괴는 김옥균이 계획했다고 한다. 그간 개화파와 김옥균을 너무
띄우는 경향이 있다. 경륜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갑신정변 당시 옥균이 33,
홍영식 29, 박영효 23세였다.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어리다.)
일본의 부추김을 받아 천지도 모르고 깨춤을 춘 면이 있고,
또 나중에 보면 개화파는 대부분 친일 매국노가 되어 버린다.
한양성 축성 할 때 가장 난공사(難工事) 구간이 동대문 일대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종로 5가 배오개부터 동대문 일대가 온통 늪지라 뭘 쌓으면
자꾸 기울어져 애를 먹었다. 지금 동대문은 고종 6년(1869) 다시 지은 것인데
당시 소나무를 촘촘히 박아 넣고서야 겨우 터를 다졌다.
도성(都城)중 동대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은 것도 방어상 이유보다는
약한 지반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사진 : 흥인문에 붙은 센서. 반짝거리는 흰 점이 센서로 이것을 단 이유는
문이 자꾸 기울어 어느 정도인지 재 보기 위함이다. 사진으로도 홍예-아치와
몸체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땅 아래가 비어 지금 문은 허공에 뜬 상태다.
지하철 때문인가 했더니 지하수를 퍼 내기 때문이다. 원래 늪지로 밑에 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줄어 드니 허공에 뜰 수 밖에. 그나마 지하철 철구조물이
간신히 받쳐 주고 있으나 상태는 심각하고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한다.
오간수문(五間水門)
동대문을 나와 오간수문으로 간다. 청계천 출구에 세워진 다섯 칸 수문,
오간수문은 그 자체로 도성의 성벽인데 1907년 일제 통감부 시절 헐렸다
사진: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그림이 커서 스캔을 두 번에 나누어 하고 붙였더니 이음매가 보기 싫다.
1760년 경진년 개천(開川-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천(濬川)할 때 영조대왕이
다섯 칸 수문 위에 친림한 광경이다. 다리 위에 쳐진 막차(幕次) 중앙 빈 자리가 대왕의 표시다.
옛날 어진(御眞) 외는 감히 임금을 그리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나타냈다.
왼쪽으로 흥인문 지붕 일부와 옹성이 보인다.
다섯 칸 홍예에 쇠창살 문이 걸려 있고 거북이가 새겨져 있다.
개천 바닥에는 일꾼들이 소를 끌거나 가래질로 흙을 퍼낸다.
청계천을 복원 했다지만 오간수 다리는 복원할 길이 없다.
동대문 시장 앞 그 많은 교통량을 옛 다리로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남긴 것이 옛 다리의 흔적과 그림이다.
사진: 오간수다리 위 길 옆에 소공원 같은 것이 보이고 안에 웬 돌들이 있다.
옛 다리를 복구할 수가 없어 흔적 표시를 한 것이다.
사진 : 위 석물 주위 도로에 그린 그림. 무심히 보면 추상화 내지
길에 한 낙서 같으나 옛날 오간수다리가 저렇게 있었다는 표시다.
사실 이런 방법 밖에 없겠으나 조금 더 돈을 들여서 페인트 대신 타일
또는 돌이라도 써서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차는 많고 일행을 놓칠 수
없어 급히 찍어 사진이 시원찮지만 옛 다리 폭으로 자세히 그려 놓았다.
다리 아래 오간수문 모형도 만들어 두었지만 유명해서 여기서는 생략한다.
동대문 운동장
성곽답사는 동대문 운동장 곧 현재 풍물시장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사진 : 스탠드 모서리에서 아래 중앙을 잇는 선으로 옛 도성이 있었다.
요즈음 이 운동장을 헐고 새로 뭘 근사하게 짓겠다고 현상 공모하여 외국인
설계가 당선 되었다. 해방 후 임정(臨政)귀국 환영식, 반탁대회, 백범 국민장,
재일교포북송반대, 북괴만행규탄, 예비군창설 대회 등등 수많은 현대사의
장면이 여기서 벌어졌으니 비록 기념-메모리얼 장소 까지는 아니라도
기억저장-어카이브(archive)할 만한 곳인데 왜 못 부셔 안달이냐고
이날의 강사 황평우 씨가 입에 거품을 문다.
동대문 운동장 동남편 옛 뿌루장(풀장은 요즈음 발음이다) 쪽으로 나오면
한양공고(이 자리가 한양공대 산실)가 있다. 필자 어렸을 때는 길가에 대장간
그 뒤 60년대 중반부터 스뎅(stainless steel) 그릇 만드는 공장이 많았는데
다 헐리고 길 자체가 넓어졌다. 동대문에서 여기까지 옛 성곽은 남아있지 않다.
광희문(光熙門)
한양공고에서 길을 건너면 광희문이다. 광희문 건너편 길가 가게 사이로
돌 축대 같은 것이 바로 옛 도성 흔적이다.
사진 : 광희문 건너편 성벽흔적
원래는 면이 (사진상) 코리아 스포츠 쪽이나 마감이 길 쪽으로 바뀌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신당동-왕십리 쪽에 살아 자주 지나가던 곳인데
이것이 옛 성벽 잔해(殘骸) 인줄은 이날 설명 듣고 처음 알았다.
광희문(光熙門)은 옛 도성 여덟 문- 사대문 사소문 중 남소문(南小門)으로 .
보통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렀다. 수구문은 근처에 있던
이간수문 (청계천 본류가 흘러나가는 오간수문 외로 장충단 쪽 물이 나가는
이간수문이 있었다)과 혼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체가 나간다고 시구문
(屍口門)이라고 부른 것은 ? 황평우 씨는 어느 문이나 다 나갈 수 있었단다.
그러나 구한말 또는 일제 초기 이제부터는 상여가 모든 문으로 나갈수
있다는 공고가 난 적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전에는 나가는 문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하여튼 강사-전문가가 강력하게 아니라니 입 다물었지만
좀 더 캐봐야 할 듯하다.
잘못 불렀던 말던 우리 때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문루는 없고 돌로 된 구멍
같은 것 (실은 홍예문)만 남았는데 그 앞에 온갖 쓰레기를 다 버려 놓았다.
국민학교 때 근처 골목을 지나가는데 수채구멍에 바람 빠진 흰 고무풍선이
빠져있는 걸 보고 한 아이가 뭐에다 쓰는 것인지 가르쳐 준다.
콘돔 인데 애들이 그런 말까지는 몰랐으니. 그 놈 집이 산동네였을 것이다.
당시 산동네 애들은 그런데 빨랐다.
이렇게 광희문-시구문 앞은 쓰레기 나뒹굴고 콘돔이 하수도에 막 버려질
정도로 창녀까지 있었다. 진짜 버글거리기는 청계천 7,8가-계천 북쪽 언덕
옛날 기동차 길을 따라 있던 창신동 집창촌이지만.
사진 : 복원 된 광희문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광희문 문루가 무너지고 그 뒤 홍예-아치만 남아
있다가 1975년 박조(朴祖) 때 복원하였다. 여러 가지로 미흡하지만 우선
말끔하니 어렸을 때 생각하면 그 동안 우리 정부가 일을 많이 한 셈이다.
박조(朴祖) 때 란 ?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옛 도성은 태조(太祖), 세종(世宗), 숙종(肅宗) 때
짓거나 크게 손보는데 그 기법이 각각 달라 외관상 차이가 뚜렷하다.
이날 이건 태조, 저건 숙종 때로 설명하는데 최근에 복원한 것은 또 다르다.
따라서 웃기느라고 박조(朴祖), 전조(全祖-전두환), 노종(盧宗-노태우)으로
부르는데 절창(絶唱)은 노종(盧宗)이다. 옛 시법(諡法)에 왕조를 개창하거나
고쳐 열면 조(祖), 이어 받으면 종(宗)이다. (공조덕종설(功祖德宗說)은 잊어버리라)
노태우 때 5공에서 6공으로 공화국의 차수가 바뀌긴 하지만 실재는 물려
받았으니 종(宗)이 맞긴 하다. 옛날 묘호(廟號)란 죽은 뒤에나 지어 올리던
것인데 산 사람 상대로 부르니 미안하긴 하지만 뭐 장난이니까.
신당동 성곽흔적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 앞으로 빠지는 골목 여기저기 옛 성곽흔적이
무심히 축대로 보고 지나가지만 그 중에 옛 성곽 돌이 들어 있다.
사진: 신당동 성곽흔적 1
저 돌 중 어느 것이 옛 성곽돌인지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물으니
강사는 (황평우 씨) 오래 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단다.
심지어 빌라 주차장 사이로 잠깐 보이는 축대 돌무더기도 옛 성곽돌이다.
사진 : 신당동 어느 빌라 뒤에 보이는 옛 성곽 흔적
장충체육관 옆
장충체육관 옆부터 신라호텔 뒷담 까지는 옛 도성 흔적이 꽤 남아 있다.
시대별 축조기법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있다.
사진 : 성곽흔적-장충체육관 옆
시대별 성곽축조기법
위 사진 오른 쪽에 보이는 안내판에 시대별 축조기법이 쓰여 있다.
사진 : 시대별 축조기법
태조(太祖), 세종(世宗). 박조(朴祖) 대비
사진: 성곽 흔적
아래가 태조(太祖) 때고, 중간이 세종 때고 위가 박조(朴祖) 때다.
돌 뜨던 흔적
옛 도성에 쓴 돌은 주로 창신동 채석장에서 (필자 어렸을 때까지 있었다)
가지고 왔다. 돌 캐는 방법은 바위에 먼저 구멍을 내고 통나무(밤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불면서 그 힘에 바위가 쪼개 지는데 이걸
‘돌을 뜬다’ 라고 했다.
사진 : 돌 뜨던 흔적. 구멍이 바로 통나무를 넣으려 한 자국인데
잘 안 되었는지 다른 데로 옮겨 뜨고 구멍만 남았다.
태조(太祖) 때 돌
사진 : 태조 때 성벽으로 거의 가공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는 돌 사이에
잔돌을 괴거나 ‘그랭이’ 질을 하여 면을 맞추었는데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었다.
강사는 한국의 미(美)는 인공을 자연처럼 두는 데 있다고 한다.
세종(世宗) 때 돌
사진 : 세종(世宗) 때 돌
태조 때 같이 하려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 세종 때는 보다 작게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 와서 쌓았다.
자유연맹
옛날엔 반공센터라고 했다. 필자 고3때 인 김신조네 1.21 사태 후 예비군이
창설되고 각급 학교 마다 승공대회가 열렸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회에는
승공반 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 때 여기 하루 와서 교육 받고 유물사관의 모순점
내지 모택동의 사자전술 아는 사람 하면 저요 저요 하고 손들고 대답하여
참 잘했어요 칭찬 받던 기억이 난다.
사진 : 자유연맹 돌담-타워호텔 까지 이어졌다. 세종 때 돌일 것이다.
저 돌이 바로 박조(朴祖)가 광희문 일대 일제시대를 견뎌내고 그나마
남아있던 성곽을 헐고 그 돌을 옮겨 쌓아 놓은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강사는 거의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울분을 터뜨린다.
그러나 박조(朴祖)만 나무랄 일이 못 된다. 필자의 어머니 아버지만 해도
옛날 장롱 내다 버리고 번쩍거리는 지금 보면 순 싸구려 호마이카 장 들여
놓고 좋아라 했다. 이불보로 뒤집어 씌워 놓고 사는 사람 많던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온 나라가 무식했던 것이다.
사진 : 자유연맹 축대-이 돌도 성곽 돌이다.
각서(刻書)-경주시(慶州始)
성벽 돌에 가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각서(刻書).
사진: 경주시(慶州始)
조선 팔도(八道) 곳곳에서 올라와 성벽 쌓는 부역을 했는데 여기부터
경주(慶州) 사람들이 맡았다는 표시다. 잘못 되어 무너지면 해당 지역에서
다시 올라와 일해야 하는 공사실명제다. 구간은 글씨에서 시계반대 방향-
사진상 왼쪽 방향이다.
지금 자유연맹 돌담에 있지만 기록과 대조하여 원래 광희문 부근이란
것을 알았다. 박조(朴祖) 때 허물어 옮기면서 인부들이 잘 모르지만
그래도 글씨가 있으니 바깥으로 놓았을 것이다.
남산(南山)
이 구간은 사진을 잘 찍지 못하고, 그 나마 있는 것도 박조(朴祖)
전기(前期) 아마 60년 대 초반에 보수했는지 시멘트로 떡칠을 해 놓았다.
박조(朴祖)도 후기(後期)로 가면 그나마 조금 낳아 진다.
사진 : 남산에서 옛 식물원 쪽으로 내려 가다 있는 성곽흔적
이 구간 아래는 조사가 잘 되어 있지 않다.
조선 신궁 계단
과학박물관(지금은 무엇?) 70년대 초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회관으로 지었다.
그때 육여사가 거의 사재(私財)-마치 떡장수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
털어 내 놓는 것 인양 난리를 쳤다. 하여간 근처에 식물원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일제 때 조선 신궁이 있었고 사진의 계단이 바로
신궁 올라가던 계단 그대로란다.
힐튼 호텔 옆 성곽
힐튼 호텔에서 남대문 가는 쪽으로 성곽을 복원해 놓았다.
최근에 한 듯 하니 박조(朴祖), 전조(全祖), 노종(盧宗) 때도 지나서
영종(YS ?) 이나 대종 (DJ) 때가 아닐까 ? 혹은 금상(今上)이신 무종
(이분은 자칫 군(君)으로 강봉(降封) 당할 뻔 했다)때 했을 수도 있다.
사진에 보이는 쪽은 전에 그 유명한 양동(陽洞) 집창촌이고,
사진 반대편-동쪽으로는 예언업자(豫言業者-점쟁이) 집단촌이었다.
숭례문(崇禮門)
이름에 예(禮)가 들어 간 것은 역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예가 남쪽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진 : 숭례문-이날 이미 날이 어두워 못 찍고 전에 찍은 것이다.
숭례문 현판이 세로로 걸린 것에 대하여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함이라는
속설이 있으나 강사는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하덜덜덜 말라고 한다.
이 양반 아무리 봐도 다혈질인데 남대문 앞 안내판에는 그렇게 써 있다.
답사를 다니면 웬만한 데 다 해설이 붙어 있어 정부가 꽤 일을 하긴 했으나
내용이 엉망인 것이 많다. 검증된 사실(史實)만 정확히 적던가, 속설(俗說)도
병기하고 싶으면 그런 전설도 있다는 식으로 분명히 구분해서 써야 할 텐데
노력을 하지 않는다.
남대문 천장의 용(龍)
남대문 전경은 못 찍고 홍예(아치)문 천장에 있는 용을 찍었다.
D-War 에 나온 용은 서양 dragon 이 아니라 바로 저런 한국 용 얼굴이다.
중국 용 카피했다면 할 말은 없고, 장궤(掌櫃) 들이 그런 말도 하는 모양이다.
애들이 덩치 값을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용은 발톱이 보통 삼조(三爪)
아니면 오조(五爪)인데 저 용은 발톱이 네 개다. 제대로 고증이 된 것일까?
이상으로 이날의 답사를 마쳤다.
'우리내 삶과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혀져가는 것들 <흙집> (0) | 2009.02.15 |
---|---|
[스크랩] 서울성곽 혜화동구간 답사기 (0) | 2009.02.10 |
[스크랩] 600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서울 성곽 (0) | 2009.02.10 |
[스크랩] 서울성곽 낙산구간 답사자료 (0) | 2009.02.10 |
[스크랩] 오줌을 싸면 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할까? (0) | 2009.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