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전도 (首善全圖)에 나타난 동대문-낙산-응봉 구간 성벽
수선전도 (首善全圖), 김정호(金正浩) 목각(木刻) 고려대학교 박물관
연 대 : 1824∼34년, 크 기 : 67.5× 82.5 cm. 보물 제853호.
성곽 개요
길이
태조 때 59,500 척 (석성 19,200 척 + 토성 40,300 척), 세종 때 60,892.8척
1975년 정밀측정 결과 18.127 km, 평지는 거의 헐리고 산지 10.5 km 만 남음.
성곽의 폭 (태조 때 기준) 하단 24척, 상단 18척
성곽의 높이 험한 곳 15 척, 낮은 곳 20척, 평지 23척
성의 직경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세종실록지리지
옛 도량형 단위는 종잡기 어렵다. 보(步)는 6자(尺)지만 어떤 자냐에 달렸다.
같은 척이라도 21.3cm(주척), 30.3cm(영조척) 47.3cm(포백척) 등 여럿 있다.
위 성곽 둘레에 쓴 자는 영조척 30.3 cm 인듯 하다.
도성의 인구(都城人口)
조선 후기에는 대략 20만 정도가 한양성 안팎에 살았다.
정조 때인 1789년 기준 도성 인구는 성안 112,371 명, 성밖(성저십리
城底十里)에 76,782명 계: 189,153 명이었다.
다음은 조선 후기 한성 5부 인구변화 추이
위 표에서 중부는 성밖이 포함될 수 없지만 동,서,남, 북부에는
성밖-성저십리 城底十里) 인구가 들어 있다.
성곽축조 약사(略史)
1396년 조선 태조 5년 1~ 2월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 여명을 동원하여 대부분 구간 건설.
1396년 조선 태조 5년 가을
농한기인 8,9월 49일 동안 다시 79,400 명을 동원하여 미처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
1422년 세종 4년 1월
전국에서 322,400명 동원하여 대대적인 보수 확장.
겨울 농한기 38일 동안 다 끝냈으나 사망자가 무려 872명
1704년 숙종 30년
성곽을 대대적으로 수리, 북한산성(北漢山城)까지 쌓아 도성 방어체제 정비
1899년 서대문-청량리 전차 부설, 동대문, 서대문 부근 성곽 일부 헐림
1900년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 부설하며 남대문 부근을 철거했다.
시대별 축조방법 변화
공사진행 방법
태조 때 59,500 척의 성벽구간을 600척씩 97개로 나눔.
각 구역 표시는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정함.
북악산 동쪽에서 천자문 첫 글자 ‘천(天)’으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북악산 서쪽에서
천자문 97번째 글자인 조민벌죄(弔民伐罪) 중 조(弔)로 끝남.
각 구간은 다시 100 척씩 구분함. 이 방법은 그 뒤 그대로 이어짐
각서(刻書) 와 공사 실명제
각 구간마다 공사 책임자와 도변수, 석수 등 기술자의 이름을 새겼으니
공사 실명제를 한 셈이다. 지금도 군데군데 각서가 남아 있다.
위는 동대문 이대병원 옆 성벽에 있는 각서(刻書)다.
이패장 절충 (二牌將 折衝) 삼패장 사과(三牌將 司果)는 공사책임을 맡았던
훈련도감 장교들 이름이고 맨 끝 강희(康熙) 45년 4월은 기년표시다.
강희 45년은 곧 우리 숙종 32년 1706년이다.
4대문 이름
인간의 다섯 덕목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인의예지신)을 대문이름에 넣었다.
동(東) :오행(五行)중 목(木), 색은 청(靑), 오상은 인(仁) 따라서 흥인문(興仁門)
서(西): 오행-금(金) 색-백(白), 오상-의(義) 돈의문(敦義門)
남(南): 오행-화(火) 색-적(赤), 오상-예(禮) 숭례문(崇禮門)
북(北): 오행-수(水) 색-현(玄), 오상-지(智) 숙정문(肅靖門)
(지(智)와 정(靖)은 뜻이 서로 통함.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
중앙: 오행-토(土) 색-황(黃), 오상-신(信) 보신각(普信閣)
대문 외에 다시 작은 문-소문(小門)을 냈으니
동소문 : 처음에 홍화문(弘化門)이다가 혜화문(惠化門)으로 바꿈
서소문 : 처음 소덕문(昭德門) 나중 소의문(昭義門)
남소문 : 광희문(光熙門), 북소문 : 창의문(彰義門) 속칭 자하문
(*) 서울 성곽과 북한산성 이외로 숙종 때 창의문 밖에 인왕산과 북한산을
연결하는 서성(西城) 일명 탕춘대성(湯春臺城)을 쌓았다.
홍제동에 있는 홍지문(弘智門) 일명 한북문(漢北門)은 이 서성의 문이다.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지정번호 보물 제1호
태조 6년 (1397)에 처음 세우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낡고 기울어
고종 5년(1868)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성문을 쌓고 2층 문루를 다시 지었다.
정식 이름은 흥인문이지만 옛날부터 편하게 부를 때는 동대문이었다.
….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실록 태조 5년(1396 병자) 9월 24일
흥인문 현판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하고 지(之)가 더 들어있다.
이 지(之)는 영어의 of 정도로 불필요한 것이나 서울을 풍수로 보면
서쪽 인왕산은 웅장한데 동쪽 낙산(駱山)이 허하여 이를 보충해야 한다는
비보(裨補)사상에서 한 글자 더 넣은 것이다.
흥인문은 서울 성곽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동대문 옹성은 군사적 필요보다 비보사상과 주위가 늪지라 지반이 물러
보강차원에서 세웠다고 한다. 지하수를 함부로 퍼 쓴 덕에 지반이 가라앉아
지금 위험한 상태며 지하철 구조물 덕에 간신히 버틴다고 한다.
임진란 때 왜군 제 1진 소서행장(小西行長) 군대가 동대문으로 들어 왔다.
실록 선조 25년(1592 임진) 5월 3일
….적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러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설이 모두
철거된 것을 보고 의심쩍어 선뜻 들어오지 못하다가 먼저 십 수 명의
군사를 뽑아 입성시킨 뒤 수십 번을 탐지하고 종루(鍾樓)에까지 이르러
군병 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 입성하였는데,. .. 후략
왜적(倭賊)은 부산포에 4월 13일 내려 한양에 5월 3일 입성했으니 20일 걸림.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닷새 만인 12월 14일
한양에 들어 옴. 보병과 기병의 차이.
동문조도(東門祖道)
겸재 정선, 영조22년 (1746) 경, 모시에 엷은 채색,
22.0 x 26.7 cm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동대문에서 청계천 오간수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근경으로 잡음.
내청룡 낙산, 외청룡 안암산 및 금호동 산줄기 수릿재 언덕은 좌우중경.
멀리 우뚝 솟은 용마산은 원경. 창신동 동망봉은 암산으로 표현.
조도 (祖道)는 '길 떠나는 이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 송별’ 하는 뜻.
따라서 동문조도 (東門祖道)는 란 동대문 밖에서 전별한다는 뜻임.
동대문 너머 그림 중앙 동묘 (東廟)-동관우묘는 옛날 먼 길 떠날 때
친지들이 동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을 하고 헤어지는 지점이었음.
답사 시작점
동대문 교회-1890년 스크랜튼(W.B. Scranton)이 세운 오래 된 감리교 교회.
이화대학병원은 여진족 사신을 재우던 북평관(北平館) 자리.
여진이 청나라가 된 뒤에는 전에 명나라 사신이 묵던 태평관
(지금 소공동 조선호텔)을 쓰니 북평관은 쓸 일이 없어 짐.
왜(倭)의 사신이 묵던 곳은 동평관
창신동 채석장
동대문 교회에서 창신동 채석장이 보임. 서울 성곽 돌은 여기서 주로 뗌.
낙산(駱山)
모양이 낙타(駱駝)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타락산) 또는 낙산이라고 함.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 내사산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에 해당. 산세가 인왕산에 비해
길게 뻗치지 못하고 허(虛)하므로 여러 가지 비보(裨補)적 조치를 취하게 됨
사산(四山)과 사신사(四神砂)
내사산 외사산하고 보통 사산(四山)으로 쓰지만
풍수에서는 사신사(四神砂)라 하여 모래 ‘사’를 씀
사(砂)는 혈(穴) 전후좌우에 있는 산과 물을 뜻한다.
사신사(四神砂)란 좌청룡,우백호, 남주작(案山) 북현무(鎭山)다.
남산(南山)
남산(南山)은 본명이 목멱(木覓)이니 고어(古語)로 마뫼 즉 남산이란 뜻이고
이 밖에 인경(引慶)이나 종남(終南)이라 칭하기도 한다.
남산은 저 뾰족하고 날카로운 북악과는 반대로 선이 아주 부드럽다.
북악이 북국의 산이라고 친다면 남산은 남국의 산과 같이 어느덧
염려(艶麗)한 정조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호암 문일평
마제잠두(馬蹄蠶頭) 형
남산은 동쪽 봉우리가 약간 낮고 서쪽 봉우리가 약간 높아
마치 한 일자(一字) 를 써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다.
서예에서 일자는 마제잠두법(馬蹄蠶頭法)으로 쓰라 한다.
붓을 대는 왼쪽 끝부분은 말발굽처럼 만들고 붓을 떼는 오른쪽 끝부분은
누에대가리처럼 마무리 지으라는 뜻이다…(최완수)
목멱조돈(木覓朝暾), 영조17년 (1741), 비단에 채색, 29.2 x 23.0 cm
경교명승첩, 간송미술관 소장
양천관아-지금 가양동 쯤에서 본 남산이니 위 설명과는 좌우가 뒤바뀌었다.
한양 도성의 진산-백악에 이르는 용맥
한북정맥이 예봉 운길을 거쳐 불수사도북-불암, 수락, 사패, 도봉, 북한산
(삼각산)으로 이어지는 것을 낙산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다시 삼각산 연봉을 살피면 백두대간-한북정맥을 따라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에 맺혔던 기운이 남쪽을 따라 꿈틀거리다가 보현봉에서 형제봉
능선으로 내려와 도성의 진산 백악(북악)을 만드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동궐-창덕궁의 주봉이 북악에서 동쪽으로 뻗은 응봉(鷹峯)이란 말을
시내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낙산에 올라오면 확실히 보인다.
동소문-혜화문(東小門 惠化門)
진산(鎭山)-북악에서 산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이룬 봉우리가 응봉(鷹峯)이다.
응봉(鷹峯)에서 내청룡 낙산(駱山)과 이어지는 마루에 동소문을 세웠다.
동소문 (東小門) 처음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성종 때 대비가 셋씩이나 되어 창덕궁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태조가 양위 후 상왕으로 지낼 때 쓰던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이라 하고
그 정문 이름을 또 홍화문(弘化門) 이라고 붙였다. 두 문의 이름이 같으니
혼동이 일어 나 중종 6년(1511년) 동소문 이름을 혜화문(惠化門) 으로 바꾼다.
겸재 정선, 동소문(東小門), 영조30년 (1754) 경,
비단에 엷은 채색, 16.7 x 18.1 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왼쪽은 응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오른쪽 봉우리는 내청룡인 낙산(駱山).
오른쪽 아래 구름이 휘감아 도는 곳이 오늘 날 대학로요,
그림 중앙 소나무 있는 곳이 혜화동 성당이다.
겸재의 시점(視点)은 창경궁, 서울대 병원 사이 언덕이다.
문에 아치만 있고 문루(門樓)가 보이지 않으니 임진왜란 때 불탄
문루(門樓)를 영조 20년(1744년) 재건 하기 전 모습임
비록 소문(小門)이지만 서울에서 강원도, 함경도로 가려면 이 문을 나가
미아리 고개 넘어 양주 포천으로 가야 했기에 대문(大門) 이상으로 붐비었다.
1939년 일제 강점기 때 도시확장 명목으로 동소문 고개를 자르고 헐어 버림
1992년 에 복원 1994년에 완공했으나 교통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
원래 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언덕 위에 있다.
지금은 왜 문이 그런데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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