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아시나요

"해군 가족이 뜨개질해서 첫 전투함 장만했죠"

shepherd2 2020. 2. 28. 07:45

"해군 가족이 뜨개질해서 첫 전투함 장만했죠"

양승식 기자 입력 2020.02.28. 03:52

 
 
92세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6·25 발발 다음 날 北 선박 격침.. '대한해협해전' 승리 이끈 주역
"國難엔 결국 국민이 나설 수밖에" 임관 70주년 맞아 소회 밝혀

 

아흔두 살의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은 1950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2월 25일)한 지 4개월 만에 6·25를 겪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인 6월 26일 부산 동북쪽으로 기습 침투하던 북한 무장 선박을 격침했다.

북한군 최소 600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추정된 함정을 격침한 이 전투는 6·25 최초의 해전이자 승전이었다. '대한해협해전'으로 불린다. 전사(戰史)학자들은 이 전투에 대해 "부산항은 당시 한국에 군수 보급품과 증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로, 무장 상륙군을 수장시킨 건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최 대령은 70년간 전장과 사회를 누비며 조국을 지켰다. 임관 직후엔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로 활약했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해군 장병이 월급을 내고, 해군 가족들이 바자와 뜨개질로 돈을 벌어 미국에서 사온 전투함이 백두산함이다.

 

지난 25일 임관 70주년을 맞은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의 모습. 해군은 이날 최 대령에게 참모총장 명의의 축전을 보냈다. 아래 사진은 1951년 2월 2차 인천상륙작전 직후 참가자들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701함장 노명호 소령, A. E. 스미스 미군 소장, 통역관 최병해 대위, 상륙부대장 김종기 소령,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 /김지호 기자·해군 제공

 

최 대령은 지난 70년의 소회를 묻자 "온 국민의 힘으로 지켜낸 나라를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6·25 당시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온 국민이 합심했기 때문"이라며 "소년병과 여성, 50대 지게부대가 합심해, 전 국민이 힘을 합쳤다"고 했다. 최 대령은 최근 우한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도 "지금은 온 나라가 병(病) 때문에 어려운 전례 없는 국난(國難)의 시기"라며 "(6·25 때 그랬듯) 온 국민이 나서야 국난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최 대령은 금성충무무공훈장 등 무공훈장 4개를 받고 1968년 전역한 뒤 안보 강연을 다니며 전사자 유족 찾기 운동을 펼쳤다. 6·25 당시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진 11명의 문산호 민간인 선장과 선원 명단을 찾고, 이들의 공을 재조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최 대령은 "민간인이지만 나라를 지키려 참전했던 그런 사람들을 기려야 하는 건 당연했다"고 했다.

그는 "국민 행복의 울타리는 국가"라며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 국민도 그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도의) 타고르 시인은 한국이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지만, 또 '힘 없음은 곤경을 유발한다'고 했다"며 "이런 것을 우리 국민이 아는 게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최 대령은 아들 넷을 모두 장교로 복무시켰다. 최재형(64) 감사원장이 그의 둘째 아들이다.

1950년 2월 25일 최 대령과 함께 임관한 해사 3기 54명 중 생존 용사는 9명이다. 심승섭 해군참모총장은 지난 25일 이를 기려 동기생 회장인 최 대령에게 축전을 보냈다. 심 총장은 "선배님들은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최일선에서 목숨을 바쳐 적과 맞서 싸웠으며, 자랑스러운 해군의 전통을 이어가며 대한민국 발전을 이끄는 역군으로 활약하셨다"며 "선배님들의 이러한 희생과 헌신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지금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최 대령은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거동이 어려운 동기생들에게 이 축전을 직접 전달할 계획이다.

★ 앨범명 : 김추자 독집 [가는 길 / 슬퍼하지 않으리